상단영역

본문영역

솔베이지의 노래 [ 2 ] 락바라마

김홍성
  • 입력 2020.06.11 07: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커다란 산이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새파란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는 그 산의 봉우리들은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는 구름 같은 것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락바 라마

 

유스호스텔의 늙은 종업원 이름은 락바 라마였다. 나이 오십이 넘어 보였는데 실은 사십이 채 안 된 사람이었다. 네팔의 동부 산악지방 출신, 18세에 인도 군에 지원 입대해 7년간 다르질링 인근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 트레킹 회사의 포터로 벌이를 하다가 독립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다르질링 유스호스텔에 오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벌이를 해왔다. 때로는 쿡, 때로는 가이드, 때로는 포터라고 했다.  

 

락바 라마의 이력을 그만큼이나마 알게 된 것은 사흘 내리 심한 몸살을 앓고 난 후였다. 사흘 동안 락바는 아침저녁으로 벽난로에 장작을 때 주었고, 마늘을 다져 넣은 녹두죽을 끓여다 주었다. 깨진 유리창 사이에다 종이 박스를 끼워 운무를 차단해 주기도 했다. 가장 심하게 앓았던 둘째 날 밤에는 양털로 짠 두꺼운 담요를 가져다 매트리스 위에 깔아 주기도 했다.

내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게 되자 락바는 말했다.

-다르질링의 겨울은 아주 나쁘다(winter very bad). 짙은 운무 때문에 해가 나지 않고 아주 춥다(heavy fog no sun very cold). 급수에 문제가 많다(water big problem). 관광객이 없고 일도 없다.(no tourist no job).

괄호 안에 넣은 그대로, 단순한 몇 마디 영어 단어를 나열했지만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나는 락바 라마에게 그의 신상에 대해서 물었고 그는 대답했다. 다음은 그 중 한 대화다.

-인도 군대는 좋더냐?(India army time OK?)

-때로는 좋았고, 때로는 나빴다.(sometime OK, sometime no OK)

훗날 조금은 세련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위와 같았다. 이 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정확한 정보 교환보다는 느낌 또는 교감을 필요로 할 때가 더 많았다.

몸을 추스른 후에도 외출은 삼갔다. 열은 내렸지만 기침은 여전히 심했다. 락바가 양철배에 관심을 갖기에 설명해 줬더니 그 방의 어느 창턱에서 타다 남은 납작한 양초 토막을 금방 찾아 왔다. 양은 대야에 물도 담아 왔다. 앙증맞은 배가 제법 증기 엔진 소리를 내며 대야 가장자리에 머리를 대고 맴도는 것을 보면서 락바 라마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촛불이 꺼지고, 다른 초 토막을 찾아오고 하던 중에 놀이는 결국 시들해졌다. 락바는 대야를 들고 나갔고 나는 양철배를 다시 창턱의 일기장 위에 놓았다. 유리창 밖은 여전히 운무가 짙었다. 양철배는 선창에서 운무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요트 같았다.

아마 그 뒷날 아침이었을 게다. 잠에서 깨서 무심코 바라본 유리창이 평소보다 밝았다. 운무가 걷히면서 아침 햇살이 퍼지는 중이었다. 아침 햇살을 향한 창문 하나를 활짝 열어 젖혔다. 커다란 산이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새파란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는 그 산의 봉우리들은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는 구름 같은 것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풍경이었다. 좀 더 후련하게 보기 위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옥상에는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락바 라마였다. 환한 햇살에 흰 이를 반짝이며 락바가 말했다.

 

칸첸중가 !”

 

해발 8598미터. 설산 칸첸중가를 처음 본 감격이 충분히 저장되기 전에 시야가 흐려졌다. 강렬한 태양열에 의해 대지의 수분이 다시 증발하면서 대기의 수증기 농도가 점점 짙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골짜기에 낮게 엎드려 있던 구름이 뭉실뭉실 부풀어 오르더니 산등성이를 타넘으며 맹렬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7시가 채 못 되어 다르질링은 다시 짙은 운무에 휩싸여 버렸다. 칸첸중가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계속>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