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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의 스타박스 129] 두산 (OB)베어스의 김영신 포수 죽음의 진실은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6.0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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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가 40년이 다 되어가면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벌써 30명 가까이나 된다.

코칭 스텝 진 가운데는 삼성 라이온즈 초대 감독 서영무(뇌졸중), 전 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 감독 김동엽(심장마비), 쌍방울 레이더스 수석코치 임신근(호흡곤란으로 인한 심장마비). OB 베어스 윤몽룡 코치(백혈병),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있다가 현직에서 사망한 김명성(호흡곤란으로 인한 심장마비)등이 있다.

그리고 선수 출신으로는 삼미 수퍼스타즈 등에서 활약했던 재일동포 장명부(심장마비). 삼미 수퍼스타즈 김동철 투수(자살), 삼성 라이온즈 장효조(위암),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대장암), MBC 청룡 등에서 수비 형 포수로 활약한 심재원(폐암), MBC 청룡 외야수 김정수(교통사고),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교통사고), MBC 청룡 투수 김경표(교통사고),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상진(위암), MBC청룡 포수 김용운(교통사고), 삼미 수퍼스타즈 포수 김진우(심장병), 롯데 자이언츠 외야수 조성옥(간암), 롯데 자이언츠 강속구 투수 박동희(교통사고),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포수(뇌사), 두산 베어스 외야수 이규환(실족사), 한화 이글스 김성훈 투수(실족사), 기아 타이거즈 이두환 내야수(암), LG 트윈스 내야수 이장희(실족사), 한화 이글스 권근한은 2군에만 머물다 실망한 나머지 자살을 했고, 해태 타이거즈 4번 타자 출신 이호성(자살), 그밖에 프로야구해설가 하일성(자살) 등등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이 있듯이 유명을 달리한 프로야구 선수(코칭 스텝)들은 거의 모두 사망원인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명백한 자살로 들어난 이호성 선수 외에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선수가 있다.

전 OB 베어스 포수 김영신다.

김영신은 국가대표 포수 출신으로 1985년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기량이 좋았으나 프로 입단 후 OB 베어스의 김경문, 조범현, 정종현 같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 별로 활약을 못했었다.

김영신의 불행은 ‘포수왕국’에 입단을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신은 85년 OB 베어스 입단 첫해 겨우 13경기에 출전, 21타수 3안타(0.190)에 그쳤고, 86년에는 9경기에 나가 11타수 1안타(0.091)의 참담한 성적만을 남겼다.

당시 팀당 경기수가 85년에는 110경기, 86년에는 108경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덕 아웃에 앉아있기만 할 정도였다.

김영신 선수는 1987년 1월, 추운 겨울날 일산 앞 한강 하류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김영신 선수는 1987년 1월, 추운 겨울날 일산 앞 한강 하류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김영신 변사체로 발견돼

김영신은 1987년 1월, 추운 겨울날 일산 앞 한강하류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과연 김영신은 자살을 한 것일까?

당시 OB 베어스에는 프로야구 원년, 사이좋게 안방 자리를 양분하고 있던 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과 기아 타이거즈 조범현 감독 그리고 백업 포수 정종현이 버티고 있었다.

세 선수 모두 공격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수비 형으로 프로야구 정상급 포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김경문 포수는 당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박철순 투수의 전담포수였다.

박철순은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 팀에서 더블A 수준까지 올라갔던 투수로 당시 한국 투수들이 듣도 보도 못한 너클볼을 주 무기로 했는데, 김경문 포수가 회전이 거의 걸리지 않는 너클볼을 잘 받아냈다.

박철순은 한국 타자들이 공통적으로 약한, 몸 쪽 공을 잘 던졌는데, 김경문이 몸 쪽 공과 너클볼 그리고 바깥쪽 공을 던지는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잡아냈다. 그래서 박철순이 자신보다 2살 어린 김경문을 매우 귀여워했다.

김경문은 85년에 57경기에 출전 79타수 15안타(0.190), 86년에는 86경기에 나가 189타수 33안타(0.222)의 타율을 남겼다.

박철순이 마운드에 오르지 않으면 조범현에게 더 많은 기회가 왔다.

조범현은 투수를 리드하는 인사이드 웍과 미트 질이 좋았다. 도루 저지 율 3년 연속 1위를 할 정도로 2루 견제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조범현은 85년에는 김경문 보다 30경기가 더 많은 87경기에 출전해서 239타수 57안타(0.238)를 기록해 사실상 주전포수 역할을 했다. 85년만 해도 박철순 투수가 허리 부상으로 마운드에 많이 오르지 않아 조범현 포수에게 더 기회가 많았었다.

조범현은 86년에는 41경기에 출전해서, 86경기를 뛴 김경문 보다 경기에 나가는 횟수가 훨씬 적었다. 65타수11안타(0.169)를 기록했다.

김경문이 박철순 투수의 전담 포수 였다면, 조범현은 당시 최고 강속구 투수 였던 계형철 투수의 전담포수 였다.

계형철 투수의 공은 당시로는 매우 빠른 140km 대 후반에다 공 끝이 묵직했다. 조 감독은 계형철 투수가 원 바운드로 던지는 것 까지 감안해서 블로킹 훈련을 할 정도로 용의주도한 포수였다.

85년은 조범현 포수가 87경기, 김경문 57경기 그리고 김영신은 겨우 13경기에 출전했다. 세 포수의 경기 출전수가 80경기에 불과한 프로야구 연간 경기 수보다 더 많은 것은 한 경기에 2~3명의 포수가 투입된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방에 앉지 않더라도 대타로 나간 것 까지 포함되었다.

86년에는 김경문이 86경기에 출전해서 가장 많이 나갔고, 조범현 41경기 그리고 김영신은 겨우 9경기에 나갔을 뿐이다. 또한 정종현은 85년 24경기, 86년에 7경기에 출전했었다.

당시 OB 베어스 안방은 김경문 조범현이 양분하고 있는 가운데 정종현이 백업 포수로 있어서 김영신의 설자리를 별로 없었다.

김영신이 이에 실망을 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김영신은 OB 베어스에 들어오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수였다.

김영신은 심재원 포수가 프로로 전향을 한 이후, 국가대표 포수로 한번도 주전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었다.

국가대표 포수 출신이 아무리 프로야구 팀이라고 하지만 한 선수도 아니고 두 선수 또는 세 선수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김영신이 선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김영신이 사망한 87년 1월을 시점으로 김경문이 29살, 조범현이 27살, 정종현 27살 그리고 김영신이 26살이었다.

스포츠 세계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은 33개의 다양한 사건을 뒷담화 형식으로 풀어낸 기영노의 '미스터리 스포츠'(자료= 물레리뷰 블로그 갈무리).
스포츠 세계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은 33개의 다양한 사건을 뒷담화 형식으로 풀어낸 기영노의 '미스터리 스포츠'(자료= 물레리뷰 블로그 갈무리).

김영신의 54번 OB(두산)베어스 영구결번

또한 프로야구는 트레이드 제도가 있어서 김영신이 다른 팀으로 가서 포수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프로야구에서 ‘포수는 최소한 5년을 키워야 실전에 쓸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주전 포수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김영신은 국가대표 출신으로 기본기가 잘 잡혀 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세 선배들을 따라 잡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본인 마음대로 갈 수는 없지만, 코칭 스텝(당시 김성근 감독)이나 프런트에 트레이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김영신이 당시 OB 베어스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에 적응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김성근 감독 스타일은 투수의 실수는 지적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거의 모든 책임을 포수에게 묻는다. 선수가 감독의 그런 스타일을 안다면 자신이 지적을 당하더라도 어느 정도 감안을 하고 받아 들어야 한다.

또한 김성근 감독은 한번 사람을 신뢰 하면 무덤까지 가는 스타일이다.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면 한 번 찍히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김영신이 프로야구 팀들이 본격적으로 동계훈련에 돌입하기 직전인 87년 1월초에 차가운 강물에 몸을 날린 것이다.

과연 김영신은 김경문, 조범현, 정종현 등의 벽을 넘지 못할 것 같아서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택한 것일까?

혹시 야구 외적인 일, 즉 신병을 비관하거나 이성문제 또는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살해당해 강물에 유기된 것은 아닐까?

당시 OB 베어스(지금의 두산 베어스)는 김영신이 비록 자살을 했지만 평소 열심히 노력 한 것을 높이 평가해서 그가 달고 있던 번호 54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했다.

김영신의 영구결번 54번은 프로야구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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