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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의 음악통신 252] 이 한 장의 음반: 조성진의 방랑자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0.05.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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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클래식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기획한 무관중 온라인 공연 '모멘트 뮤지컬'(Moment Musical) 기획의 일환으로 베를린 마이스터홀에서 4월 26일 일요일 개최된 무관중 단독 연주회. 한국시간으로 같은 날 밤 11시 도이체 그라모폰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된 공연을 관람하고 다음 날 아침 레코드점으로 직행해서 구입한 음반의 생생한 후기. 브람스를 제외하곤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올 3월 8일 발매된 네 번째 앨범의 수록곡으로만 구성된 프로그램을 듣고 당장에 주문한 조성진의 최신 음반에 대한 감상평.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조성진의 네번째 앨범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

먼저 유튜브 도이체 그라모폰 채널을 통해 공개된 조성진의 음반 뮤비는 항마력이 부족하다. 전형적인 유럽 감성으로 동양인 피아니스트가 런던과 베를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방랑을 하고 있는 걸 부각한다. 음반의 커버 사진은 왠지 중국 상하이를 연상시킨다. 왼쪽의 조성진은 사진인지 캐리커처인지 구분이 안 간다. 실물이 훨씬 난건 확실하다.

템포는 지극히 안정적이다. 실황과 녹음의 차이리. 특히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같은 시종일관 8분 음표의 지속인 '진행형' 곡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템포가 처음과 같을 순 없으며 종장에는 의도치 않게 빨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걸 일관성 있게 오차 없이 유지한다는 건 미디나 AI에서나 가능한 일, 인간이기 때문에 들쑥날쑥하고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휩싸이는 건데 그게 또 실연의 묘미이자 특유의 아우라다. 조성진은 자기만의 '메트로놈'으로 템포를 조절해가면서 광마에 자제심을 잃고 호흡이 가빠져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지 않는다. 맥박이 뛰는 대로 맡긴다. 끊어가고 쉬어갈 순 있는 음반 녹음의 장점이자 라이브의 리액션과는 다른 차이점이다. 지난 4월의 2악장보단 확연하게 안정적이다. 느리고 절제적이다. 뛰지 않고 걷는다.

조성진의 방랑자 환상곡 음반 내용물
조성진의 방랑자 환상곡 음반 내용물

확실히 수록된 다른 2곡에 비해 <알반 베르크의 소나타>는 인기가 없다. 유튜브 조회수만 봐도 현저히 비교가 된다. 생소하고 낯선 곡이지만 세기말적인 회색 빛깔이 농후한 고립된 인간성의 상실과 파국을 코로나 시대에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이다. 일반 라이트 클래식 애호가들은 평상시라면 찾아서 듣지도 않을 곡이 조성진 같은 스타플레이어의 연주로 접하게 되니 기쁘다. 명곡이 알리고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건 조성진 같은 연주자의 몫이다. 그저 인기와 조회수, 좋아요에 급급한 레퍼토리의 무한 반복은 스타로서의 포장에 불과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박수갈채에 도취되어 광대처럼 여흥과 오락에만 충실한다면 그건 예술의 개념을 대중의 개념과 맞바꾸고 신이 내려준 평생의 사명과 재능을 충실히 지키지도 못하고 유기하는거다. 연주자가 존재하는 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위해서다. 보존과 계승은 연주자의 막중한 숙명이며 책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뷔시나 이번 알반 베르크 등의 확대는 고무적이다. 조성진 연배에서 알반 베르크를 이렇게 소화하고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단언컨테 전 세계에 있지도 않다. 알반 베르크에서만은 조성진은 현존 피아니스트 중 단연 최고다.

30분 이상 끊지 않고 연주하는 한편의 장대한 인생 서사시인 <리스트의 유일한 소나타>. 위대한 작품이 가진 압도적인 가치를 조성진은 깊이 이해했고 깊은 고요와 숙고에서 탄생한 악보로 형상화된 점과 기호들이 풍성하게 청중들에게 안겨지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방랑, 느리게 걷기, 사색과 명상은 낭만주의의 조건이다. 환상과 상상 그리고 연주자로서의 자유가 한데 버무려진 슈베르트와 리스트 그리고 베르크까지 젊은 연주자들에게 자주 보이는 어쩌면 그게 또 부정할 수 없는 젊음의 특권인 '지나친 표현' 대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기 연주자에서 대가의 길로 들어서는 조성진이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리스트가 아니라 리스트를 연주하는 조성진으로서 대곡과 작곡가에 대한 경외와 겸손, 숭고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리스트 소나타 마지막 화음이 사그라들면 평온을 얻는다.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걸 경배하고 따르는 또 한 명의 21세기 리스트의 행보를 잔잔한 미소와 함께 따라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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