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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용기 있는 고백, 최영미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

권용 전문 기자
  • 입력 2020.04.1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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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그 일이 있은 뒤 내게 사과하기는커녕 뻔뻔하게도 나만 보면 징그럽게 웃는 그를 마주치기가 역겨웠다. 같이 일하던 선배 언니에게 K의 추행 사실을 알렸을 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운동을 계속하려면 이보다 더한 일도 참아야 돼.'"

'미투'(MeToo) 캠페인을 널리 알린 최영미 시인이 9년 만에 발표한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통해 바라본 1987년 운동권 문화의 풍경이다.

'운동'이라는 목적 앞에서 도덕률, 공정성, 사회규범 등 상위 가치가 폭력적으로 무시된 집단주의 시대를 저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86세대(80년대 학번·1960년대생)가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 행정부 등 주요 분야에서 리더 역할로 성장한 배경의 단면이기도 했다.

저자는 "지금은 유명한 정치인이나 국회의원, 법조인이 되어 우리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 명망 높은 남성 활동가들에 가려진 여성들의 고단하며 위태위태했던 일상. 선배, 동지, 남편이라는 이름의 그들에게 유린당하고 짓밟히면서도 여성들은 침묵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며 "민주주의? 자유? 평등? 혁명? 내 앞에서 지금 그런 거룩한 단어들을 내뱉지 마시길…"이라고 비판했다.'

문단에 들어와 여러 차례 당한 성희롱과 추행의 나쁜 기억까지 다시 환기한다.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처음엔 발끈했던 나도, 시간이 지나자 가벼운 성희롱에 익숙해졌다. '글을 써서 먹고살려면 이보다 더한 일도 참아야지.'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참을 수 없었다."

고은 시인에게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는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느낀 소회들도 적었다.

그는 "진실을 은폐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반성하기 바란다"면서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문단의 원로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힘든 싸움이었다"며 문단 기득권층을 비판했다.

최영미는 2019년 3월, 현 정부의 다주택 보유자 규제와 집값 잡기가 한창일 때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가 이른바 '노른자'로 불리는 투기 지역만 골라 아파트 3채를 보유한 데 대해서도 강한 분노와 상실감을 표출했다.

그는 "장관 후보자들의 억 억 소리에 억장이 무너졌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쉽게 돈을 버나"라며 "부동산 투기를 잡아야 할 장관이 부동산 투기와 온갖 꼼수의 달인이라면 웃기는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지난 5년간 신문·잡지 기고문과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로 엮인 산문집ㅇ이다. 시에 대한 고민과 치매 노모 간호 등 일상에서 겪는 일들에 대한 소회와 감상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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