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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214] Critique: 발렌티나 리시차 피아노 리사이틀 '격정과 환희'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0.03.23 09:01
  • 수정 2020.03.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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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검투사, 그녀의 눈물과 다섯 곡의 앙코르 그리고 길게 늘어선 줄

갈까 말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음악회 하루 전인 21일 토요일, 정세균 총리가 종교, 실내체육, 유흥시설 등 다수가 모이는 행사 집회를 앞으로 15일간 자제해 달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데다 주변에서 성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음악인들이 말린다. 리시차야 하고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관객석의 청중들이 교차 간염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길 잘했다. 꼭 오지도 않은 사람이 말은 많다. 무대의 연주자나 객석의 관객이나 화창한 봄 날씨에 진정한 춘분을 만끽한 답답한 코로나 블루를 오래간만에 날려버린 시간이었다.

코로나 확산과 감염 공포에도 2년만에 한국을 찾은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리시차는 현대 트렌드와 미디어의 흐름을 일찌감치 포착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춘 브랜드와 전략을 짠 혁신가이다. 남들이 다 하는 방법으론 절대 부각할 순 없다는 걸 파악하고 유튜브를 통해 자신을 노출시키고 청중과 팬을 찾아서 만들어간 사람이다.신문, 방송 등 전통 매스미디어 대신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콘텐츠를 전달하고 유통하는 플랫폼을 활용,콘텐츠를 제공하고 창작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 1인 미디어 창작자, 유튜버 중에서도 영향력의 크기가 큰 인물을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었다.1인 기업으로서 직접 콘텐츠를 제작, 유통하면서 충성도 높은 팔로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전환한 피아니스트다.

열광하는 관객들, 가뭄 속의 단비처럼 갈증을 해갈한 탁월한 이슈메이커 발렌티나 리시차

사람들이 과연 올까 하는 우려는 예술의전당 3거리부터 북적거리는 인파를 보면서 기우였단 걸 깨달았다. 화창한 날씨에 나들이 나온 가족단위 시민들까지 예술의 전당은 활기를 띠었다. 예술의전당 자체가 방역이 철저해 마스크 미 착용자는 아예 입장이 불가했으며 손소독제도 도처에 놓였으며 발열 카메라까지 입구에 설치되어 있고 공연 내내 마스크를 벗지 말라는 객석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안내하는 하우스키퍼까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철저한 노력이 돋보였다. 귀만 있으면 족하다. 도리어 이런 음악회가 더 안전하다. 이런 시국에 음악회에 온 사람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정 발렌티나 리시차 연주를 듣고 싶은 클래식 마니아들이니 음악회 내내 마스크를 벗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비록 만석은 아니었지만 2/3 정도 들어찬 관객 전부 마스크를 쓰고 리시차의 등장부터 숨소리 하나 없을 정도로 집중하고 몰입하면서 오늘의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매 내한 공연 시마다 화제를 몰고 다녔던 그녀가 마스크를 쓰고 무대에 등장했다.

3월의 화창한 일요일 오후,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인파로 북적이는 예술의전당

리시차의 베토벤은 하나가 아니었다. 악장마다, 하나의 악장 안에서 다양한 음색이 공존해 있었다. 17번 <템페스트> 3악장처럼 같은 음형의 모티브가 지속되는 기악곡에서 모티브마다의 다른 음색은 상이한 느낌을 주지만 일관성이진 않았다. 그런 순환은 <열정>에서도 계속되었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어찌 보면 한 무대에서 하나를 치기도 힘든 대곡을 도돌이표까지 꼬박꼬박 지키면서 소화해 낸 점이었다. 2부의 <함머클라비어> 소타나 중 3악장은 속주가 장점인 리시차가 안 그래도 1-2악장을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는데 3악장의 장대함이 마치 한없이 늘여졌다. 유한한 3악장이 끝나자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리시차의 연주에 감동받은 관객의 울음이라고 여길려는 순간, 아니었다. 무대 위 마스크를 쓴 검투사 리시차가 흐느낌의 주인공이었다. 점점 감정이 북받친 오열이 터졌다.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리시차의 말이 중간에 터진 박수소리에 파묻혀 정확히 들리지 않아 왜 리시차가 3악장이 끝나고 울음을 터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주변에서 말렸을까? 한국이 아닌 집을 떠나 해외 공연을 다니고 그녀의 고국인 미국이라고 안전하지 않은 전 세계적인 팬데믹에 우리는 하나의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공동체적인 연대와 협력이 없다면 공포로 마비된 세상에서 살 길이 없다. 인종, 종교, 국적, 성별, 나이의 구분 없이 온 인류가 미지의 영역서 발견돼 확산되는 보이지 않은 위협에 맞선 이때, 개인의 불안과 영혼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일치가 생존의 법칙이라는 걸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 3악장이 알려주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콘서트를 이어가겠지 여길려는 찰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 들려왔다. 갑자기 <월광>이라니... 그런데 마음 정비를 위해 1악장의 고요가 필요했으니란 예측은 2악장이 그리고 3악장이 이어지면서 졸지에 전곡을 다 쳤다. 오늘 정규 프로그램에서 베토벤이 한 곡 더 추가된 것이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쇼팽의 <녹턴>,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2번>이 계속 이어졌다. 연달아 총 다섯 곡의 앙코르 (그것도 리시차의 주 레퍼토리)가 이어지면서 함머클라비어 4악장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되어버렸고 당황해서 상황을 예리하게 곱씹었던 필자도 정신이 혼미해져 점차 함머클라비어 4악장의 존재를 망각할 정도였다. 

숨소리 조차 멎은 집중, 피아노 실연에 고픈 한국의 클래식 음악 마니아들

화제성은 최고다. 남들이 다 꺼려 하고 아무도 하지 않을 때 가뭄 속의 단비처럼 클래식 실연을 즐기고픈 청중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갈해준 급시우였다.확실히 리시차는 무대에서 연주하고 들려주는 걸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 행위 자체를 즐기는 피아니스트였다. 방대한 대중적인 레퍼토리로 관중의 숨통을 트여준다. 우리 청중들은 항상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수요가 있다. 그런데 그걸 우리 국내 음악인들이 지레 몸 사리고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리치사 정도의 연주력이나 스태미나, 장인 정신의 수준이 되지 못할 뿐이다. 예술이란 미명하에 포장된 우월감 아니 부족한 속내를 감추고픈 게 솔직한 고백이다. 콘서트장은 놀이터고 피아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연주하는 게 음악인의 본분이라는 걸 리시차가 보여줬다. 함머클라비어? 베토벤? 누가 어제 콘서트에서 그런 거에 관심을 갖겠는가? 강한 체력을 밑바탕으로 기존의 유명한 작품을 서커스적인 기교에 치중하고 듣기 좋고 무난한 연주를 선보이니 사람들이 열광하고 그걸로 소임을 다한 거다. 피아노만 있으면 어디서든 피아노 배틀을 펼칠 수 있는 강한 연주력을 보유한 검투사 같은 피아니스트가 발렌티나 리시차라는 걸 증명한 순간이었고 그녀의 탁월한 이슈 메이킹은 인터미션과 연주 뒤 그녀의 시디를 사기 위에 선 긴 줄이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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