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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 42 ] 울릉도 4 / 우연

김홍성 시인
  • 입력 2020.03.18 13:49
  • 수정 2020.03.2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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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여전히 사나웠다. 천둥번개가 쉴 새 없이 치고, 배는 전후좌우로 뒤집힐 듯 요동을 쳤다. 선객들 대부분은 자신의 토사물을 베개 베듯 머리에 베고 있거나 허리나 등에 깔고서 드러누운 채 곧 죽을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라면 값도 모르는 간첩용의자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머리 뒤에 대고 앞서서 걷고, 예비군들은 총부리를 겨눈 채 바짝 따라 붙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구경꺼리인가? 개구쟁이들이 신났다. 아이들 몇은 눈을 뭉쳐서 간첩용의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짓궂은 놈 몇은 눈 위에서 개똥을 주워 던지기도 했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눈을 부라린 젊은 예비군이 있어서 더 이상 침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오는 구경꾼들은 저동항에서 더 늘었다. 간첩 용의자를 앞세운 예비군들과 숙덕거리는 구경꾼들이 이룬 이 기묘한 대열은 도동항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서야 해산했다. 지서 순경 한 명이 여인숙에 가서 내 주민등록을 찾아 들고 고개를 넘어 왔던 것이다.

그들과 헤어질 때 그들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예비군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육지에 가거든 우리 울릉도 주민들의 반공정신이 얼마나 투철한지를 널리 홍보해 달라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일종의 약속이었다면 나는 이제야 제대로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몇 년 후인 1974년에 울릉도에서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면 나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 또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으니 울릉도 주민들이 얼마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육지로 돌아가는 배가 도동항을 출항한 시각에 대해서는 잊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가 탄 여객선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봉착했는지도 잊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탄 여객선의 객실들은 모조리 봉쇄되어 있었고, 그 이유는 폭풍으로 인한 드높은 파도였다. 롤링, 피칭 .......파도에 의해 배가 전후좌우로 부대끼는 통에 혹시 갑판에 나온 선객이 바다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줌 마려운 선객들 중에 남자들은 선실 구석으로 기어가서 오줌을 눌 자리를 찾아 요의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여성들은 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개중에는 신을 벗어서 사타구니 사이에 놓고 요강 삼아 오줌을 눈 후에 신에 고인 오줌을 통로에 연한 입구에 쏟아 붓기도 했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승객을 선실 안에 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봉쇄를 뚫고 갑판으로 나가 변보는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여성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시가에 인사드리러 다녀오던 길이었다는 그 젊은 여성은 차마 중인환시 속에서 고무신을 깔고 소변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객실에 드나드는 선원이 객실의 철문을 미처 잠그지 못한 틈을 타서 갑판에 나가 갑판의 난간을 붙잡고 변을 보다가 그만 바다에 떨어졌다. 다행히 갑판에 나왔던 선원 한 명이 성난 파도가 울부짖는 바다에 떨어진 여성을 보았고, 구명 튜브가 달린 로프를 던졌다. 요행히도 그녀는 그것을 붙들었다.

객실 바닥 가운데쯤에는 배의 맨 밑바닥에 마련된 기관실을 보여 주는 일종의 창문이 있었는데, 마침 내가 차지한 자리가 바로 그 유리창을 옆이어서 방금 구조된 새댁이 군용 담요를 덮어 쓰고서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있을 굵은 파이프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관실 풍경은 그렇더라도 바다는 여전히 사나웠다. 천둥번개가 쉴 새 없이 치고, 배는 전후좌우로 뒤집힐 듯 요동을 쳤다. 선객들 대부분은 자신의 토사물을 베개 베듯 머리에 베고 있거나 허리나 등에 깔고서 드러누운 채 곧 죽을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내 생애 첫 울릉도 여행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은 전혀 모르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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