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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217) - 여인의 신비

서석훈
  • 입력 2014.08.2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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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여인의 신비



김 감독은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와 산보를 하는 중이었다. 보쌈에 소주를 마신 뒤라 바로 커피숍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좀 걸어요, 우리.”라고 장화자가 먼저 제안을 했고 감독은 “그럴까요?” 하고 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루로얄 호텔 뒤 음식점 골목을 벗어나 좀 더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걷는 거야 그렇게 자신 없는 분야가 아니었다. 실의에 빠져 정처 없이 걸어도 봤고 돈이 없어 집까지 두 시간을 걸어도 봤다. 새벽에 담배가 떨어져 담배 사러 길 건너 편의점으로 가 봤고, 누가 술을 사겠다고 해 나는 듯이 걸어도 가 봤다. 그러나 이렇게 미모의 여인과, 이혼녀이지만 뇌쇄적인 몸매의 여인과 호젓이 밤거리를 걸어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 아니라 한 번도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산보가 좋은 건 마주 앉아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하지만 이렇게 나란히 걸어가면 말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말을 안 해도 자연스럽고 또 팔꿈치와 팔뚝이 만났다 떨어졌다 하며 애가 타고 또 발걸음을 맞추느라 노력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거리엔 가로등이 둘을 위해 켜져 있는 듯 했고, 한 번 올려다 본 밤하늘엔 달이 처음 보는 물체처럼 떠 있고, 별은 또 왜 저렇게 많은가 싶었다. 바람도 솔솔 불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게 마치 희롱하는 듯하고 행복을 시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인의 체취. 달콤한 살냄새와 향수 냄새와 샴푸 냄새, 이에 비할 게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리고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 그 얼굴이 무종 옆에서 걸어가고 있다는 건 세상에 이런 순간이 있다는 건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참으로 여자란 베드 위에서만 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안마시술소의 여자만 기쁨을 주는 게 아니며 걸그룹만이 눈을 흐뭇하게 하는 게 아님을 알게 하는 순간이었다.
“감독님, 감독님은 요즘 무슨 생각하세요?” 장화자가 물었다. 요즘은 어디 주로 돌아다니느냐, 뭘 처먹고 다니느냐, 돈은 좀 벌었느냐,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생각이라는 거 즉 사상이나 사고나 관념이라는 걸 묻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해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였기에 감독은 신선하면서도 내심 당황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복권 탄 돈을 어떡하면 사람들이 모르게 감춰놓고 야금야금 나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쓸까 생각하고 있지. 장화자 너를 어떻게 해 볼까 생각 중이지. 앞으로 네게 돈을 얼마 쓸까그것도 생각 중이지. 그러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남이라는 것의 신비에 대해서 생각 중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소리였다. 감독은 장화자가 이 대답에 만족하였나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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