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성 수필 [ 34 ] 함흥에서의 마지막 점심
김홍성 수필 [ 34 ] 함흥에서의 마지막 점심
  • 김홍성 시인
    김홍성 시인 ktmwind@naver.com
  • 승인 2020.01.29 16: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친구 부부와 함께 함흥 시내 만세교 부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의 친구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나서 이남으로 피신한다면서 자기 아내를 어머니 집에 한 달 정도만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김홍성 / 함흥 성천강 만세교. 일제 강점기 사진이 밑그림입니다.  

전쟁 나던 해에 어머니는 함흥시 제 11 인민학교에서 갓 교생을 마친 앳된 처녀 교사였다. 어머니는 언니와 함께 소문난 미인이었다. 어머니의 언니는 이미 결혼하여 자녀를 다섯이나 두었는데도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버들 미인이라 불렸고, 어머니는 두 눈이 초롱초롱하여 샛별 미인이라 불렸다.

어느 날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어머니를 호출했다. 장학사는 총각이었으며 공산당 당원이었는데, 어머니에게 공산당 입당을 권유하면서 자신이 추천해 주면 입당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학교에 돌아와 교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역시 총각이었으며 공산당 당원이었던 교장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안색이 변했다. 자기 말고도 샛별 미인을 아내 삼으려고 공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갓 부임한 23세의 처녀 교사인 어머니에게 말했다.

- 동무는 교장인 내 추천으로 당원이 되어야 마땅하오.

아무리 숙맥이었다지만 이 말은 곧 청혼이라는 사실을 이윽고 알게 된 어머니는 무서웠다. 어머니는 공산당원이 되는 것도 무서웠고, 공산당원의 아내가 되는 일은 더욱 무서웠다. 어머니는 폐결핵진단서를 첨부하여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머니는 폐결핵이 아니라 만성 늑막염이 있었는데 늑막염은 폐결핵으로 오진하기 쉬운 병이었으므로 아는 의사의 의도적인 오진으로 폐결핵 진단서를 받아냈던 것이다. 교장은 요양을 위한 장기 휴가를 주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사직하고 말았다.

그 직후에 어머니가 할머니(나의 외증조모)와 살던 집이 미군 폭격으로 불타버려서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시고 제 1 인민학교 부근에 있던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작은 집 식구들은 전쟁 전에 이미 월남하여 비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산 기간은 아주 짧았다. 갑작스럽게 이남으로 피난 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때는 겨울, 일사후퇴 때였는데, 일반인들이 모르게 군대에서만 암암리에 후퇴 작전을 개시한 직후였다. 그날 어머니는 친구 부부와 함께 함흥 시내 만세교 부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의 친구 남편은 점심을 먹고 나서 이남으로 피신한다면서 자기 아내를 어머니 집에 한 달 정도만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어머니 친구 집안은 함흥 만세교 건너편에서 제일 큰 부자라고 할 만큼 소문난 지주였기에 인민군들이 돌아올 경우 무슨 해코지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점심 먹고 헤어지면서 친구 남편은 다짐했다. 한 달 후에는, 길어도 석 달 후에는 유엔군이 전쟁을 종식 시킬 것이므로 그 때 돌아오겠노라고, 그 때까지만 같이 있어 달라고. 어머니는 쾌히 응낙했다. 집에는 할머니만 계셨고, 학창 시절에 그 친구에게 신세 진 일도 많았으며, 두 집안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의하면, 그 때는 누구나 한두 달 후에는 전쟁이 끝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부부가 같이 피난을 나가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헤어지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세 사람은 식당을 나와서 곧장 헤어졌다. 어머니의 친구는 옷가지를 챙겨 오기 위해 만세교를 건넜으며, 그녀의 남편은 만세교까지 아내를 배웅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안절부절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가 야단을 쳤다. 난리 통에 밖에 나가 어찌 이리 오래 있다가 오냐고 하면서 지금 당장 도립병원으로 가서 병원 앞 길가에 서 있는 트럭을 타라고 했다.

도립병원에 와 있는 트럭들은 국군 부상병들과 의료진들을 흥남부두로 후송하기 위한 트럭들이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는 부상병들과 의료진을 부산으로 후송하기 위한 배가 들어와 있었다. 그 배의 통신장이 어머니의 올케의 오빠였는데, 그는 어머니를 부산으로 데려 오라는 어머니의 오빠(나의 둘째 외삼촌)의 부탁으로 어머니 사는 집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할머니는 시간이 없으니 빨리 뛰어 가라고 어머니를 떠밀었다. 그 바람에 어머니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경남(친구의 이름)이가 오면 할머니가 데리고 있어 달라는 말만 급히 남기고, 입은 외투에 구급낭(당시엔 다들 이것을 메고 다녔다고 한다) 하나만 달랑 메고 도립병원으로 달려갔다. 도립 병원 앞 길가에 서 있는 트럭 중 맨 마지막 트럭에서 어머니의 친척 몇 분이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가 그 맨 마지막 트럭의 맨 꽁무니에 간신히 올라앉았을 때 트럭들은 시동을 걸었고 맨 앞 트럭부터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머니의 친구가 커다란 보퉁이를 양 손에 들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머니의 친구도 어머니가 트럭의 꽁무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옥희야, 너 어디를 가니?

-경남아, 나는 오빠가 갑자기 불러서 이남 간다. 미안하다. 할머니한테 너 온다는 이야기 해 놨으니까 우리 집에 가 있어라. 한 달 쯤 있다가 네 남편이 온다고 했잖니?

-남편은 이남 가서 만나면 된다. 나도 너 따라서 이남 가고 싶다. 나도 데려 가라.

-미안하다. 너는 우리 할머니하고 집 보고 있어라. 할머니한테 다 얘기해 놨다.

이러는 사이에 트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는 손도 변변히 흔들어보지 못하고 그렇게 작별했다.

나는 어머니의 이 작별에 대해서 서너 번 정도 들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작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토를 달곤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너무 고지식했다. 눈치 보이는 짓은 죽어도 못하는 바보여서 친구를 내 무릎에라도 앉히겠다고 할 용기가 안 났다.

-그렇게 헤어지고는 다시 못 볼 줄은 정말 몰랐다. 나중에 이남 나와서 경남이 남편이 경남이가 혹시 이남에 나오지 않았나 하고 찾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어머니의 언니, ‘버들 미인이라고 불렸던 나의 이모도 자식들과 함께 북에 남았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듯이 길어야 석 달이면 돌아올 줄 알고 혼자 이남에 내려온 이모부는 여러 해를 홀아비로 지내다가 이모를 빼어 닮은 이남 여성을 만나 결국 재혼하였다. 그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의 결혼식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갔다. 그 때 어머니와 이모부가 말했다. 이모부의 맏아들인 흥식이와 나의 어렸을 때 모습이 아주 닮았다고.

훗날 미국 시민이 된 외가의 한 친척이 버들 미인이었던 이모와 이모의 맏아들인 흥식이가 휴전 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모가 먼저, 나와 꼭 닮았었다는 이모의 맏아들 흥식이는 그 몇 년 뒤에 …….

그러나 북에 남은 어머니의 친구와 이남에 내려온 어머니 친구의 남편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

 

여러분의 후원이 좋은 컨텐츠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 1,000
    후원하기
  • 2,000
    후원하기
  • 5,000
    후원하기
  • 10,000
    후원하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