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홍성 수필 [ 32 ] 덕재 11 / 주막

김홍성 시인
  • 입력 2020.01.25 04: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막에서는 전표도 현금 구실을 했다. 전표 한 장 값은 막걸리 몇 되 값인지, 견치석 몇 개를 다듬어야 전표 한 장을 주는지, 보통 하루에 몇 개의 견치석을 다듬어 내는지는 잊었다. 그러나 견치석을 수거하고 전표를 주러 올라올 때 양조장 술 차도 같이 올라왔던 것은 기억한다.

비 오는 날이면 덕재 고개의 주막은 낮부터 손님이 모였다. 나도 가끔 한 귀퉁이 차지하고 앉아 막걸리를 마셨는데, 혼자라 심심하기도 했고, 호기심이 많던 때라 주막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패는 석수들이었다. 그들은 고개 마루 부근에 흩어진 화강암 바위들을 쪼아서 축대용 견치석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석재 채취 허가를 내고 석수들을 고용한 사람은 고개 동쪽 면 소재지의 양조장 주인이었다. 그는 석수들이 규격에 맞추어 쪼아낸 견치석 개수에 따라서 전표로 사들였다. 석수들은 그 전표를 모았다가 양조장 주인인 동시에 석산 주인의 사무실에 가서 돈으로 바꿨다.

주막에서는 전표도 현금 구실을 했다. 전표 한 장 값은 막걸리 몇 되 값인지, 견치석 몇 개를 다듬어야 전표 한 장을 주는지, 보통 하루에 몇 개의 견치석을 다듬어 내는지는 잊었다. 그러나 견치석을 수거하고 전표를 주러 올라올 때 양조장 술 차도 같이 올라왔던 것은 기억한다.

어느 날 보니, 견치석을 수거하는 트럭과 술 차(막걸리 탱크를 실은 트럭)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석재 채취 현장에 나란히 서 있었다. 머리를 뜨거운 햇살로부터 보호하면서 때로는 땀을 훔치기 위해 수건을 머리에 두른 깡마른 석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전표를 받자마자 그 옆에 있는 막걸리 차에 가서 전표를 내고서 막걸리로 바꿨다. 어떤 석수는 항고에 채운 막걸리를 술 차 옆에 비켜서서 벌컥벌컥 들이키기도 했다.

주막에 둘러앉은 또 다른 한 패는 사격장에서 탄피를 수거해다 팔아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었다. 탄피는 종류가 많았다. 소총이나 기관총 탄피뿐만 아니라 대포알이나 탱크나 비행기에서 떨어진 커다란 탄피도 있었다.

이 탄피들은 일단 덕재 고개 남쪽에 있는 고물상으로 모였다. 고물상 마당에는 사격장에서 수집해 온 탄피와 포탄 껍질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한쪽에는 탄두로 보이는 것들도 굴러 다녔다. 어떤 것은 새우젓 담는 길쭉한 독 같았고, 어떤 것은 장독만 했다. 고물상 마당에는 아이들이 기관총 총알 이음쇠들을 군용 전화선에 치렁치렁하게 꿰어서 줄넘기를 하며 놀기도 했다.

고물상의 고물과 탄피들은 아무나 주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사격이 종료되면 맨 먼저 사격장에 들어가 탄피들을 수거하는 권한은 피 터지는 싸움을 통해 얻는 것이었다. 특히 대규모의 사격이 시작되면 덕재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떼거리로 올라온 사람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그 탄피 수거의 우선권 때문이었다.

우선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살벌했다. 각목에 머리가 터지는 일은 예사고 대검에 배를 찔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비가 많이 와서 사격을 안 하는 바람에 살벌한 개싸움 끝의 화해주가 오가는 중이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패싸움과는 상관없이 이미 사격장 안에 들어가 포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말로 '도꼬다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포알이 떨어지는 민둥산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호를 파고 엎드려 있다가 큰돈이 되는 포알이 떨어지면 야전삽을 들고 달려 나가 그 포알이 박힌 땅에 박아 놓고 다시 호로 돌아와 사격이 끝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야전삽을 땅에 박는다는 것은 방금 그 땅 속에 방금 들어가 박힌 대포알에 대한 소유권 선언이라고 했다. 살벌한 패싸움으로 우선권을 차지한 사람들도 이들 목숨을 건 '도꼬다이'들의 권리는 인정해 준다고 했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 특별한 포알 하나가 쌀 몇 가마니 값에 팔린다는 이야기와 함께 사격장의 전설처럼 흘러 다녔다.

고물상에 모이는 사람들 중에는 팔이나 다리나 손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두 다리가 없어서 부인에게 업혀 다녔고, 또 어떤 사람은 한쪽 눈과 한쪽 팔이 없었다. 불발탄을 분해하여 값나가는 금속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가 원인이었다.

나는 포알이 떨어지는 민둥산 비탈에서 야전삽을 들고 뛰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했다. 내게는 그들이야말로 사격장의 전설이며 영웅이었다. 주막에는 바로 그런 영웅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영웅들끼리는 서로를 비하하여 부르고 있었다.

, 이 애꾸야…….

? 이 외팔이 놈아…….

저 쪽에서 '병신들이 육갑하는구나.'라고 말하는 노인은 두 다리가 없었다지독한 자학은 지독한 희열을 수반하는지 그들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낄낄거렸다. <계속>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