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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영 칼럼 淸風明月] 시집 '촛불의 꿈' 북콘서트를 마치며

김문영
  • 입력 2020.01.1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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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꿈' 북콘서트를 마치며>

 

1월11일 19시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에 있는 동자아트홀(지하철 서울역 12번 출구 연결)에서 나의 시집 '촛불의 꿈'에 대한 북콘서트가 열렸다. 출판사 다시문학(대표 윤한로 시인)이 주최하고 음악회사 SW아트컴퍼니(대표 성용원 작곡가)가 주관한 행사였다. 김홍국 정치평론가(경기대 겸임교수,시인)가 사회를 보고 SW아트컴퍼니 소속 아티스트들이 출연하여 연주와 노래를 불렀다.

연주와 노래 중간에 나는 총 4편의 시를 낭송했다. 60년이 넘는 내 인생의 첫 경험이었다. 이같은 북콘서트는 내가 알기론 대한민국 최초의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이런 북콘서트는 처음이 아닐까.

북콘서트는 김홍국 정치평론가의 사회로 시작을 알렸다. 내빈소개에 이어 민병두 국회정무위원장(민주당 동대문을)의 축사가 있었다. 민병두 국회의원은 축사에서 "나이 60세가 넘어서 어떻게 시를 쓰는가 놀라는 사람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적폐타도를 향한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시원하고 후련하게 시로 승화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 김문영 시인의 시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뇌, 양심에서 솟아올라 목청껏 외치는 열렬한 참여이고 나아가 실천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축사에 나선 윤한로 대표(시인, 대표작 분교마을의 봄)는 '30년 동안 언론인 활동을 하던김문영 글지가 문학으로 돌아와 매우 기쁘고 환영한다'고 전제하면서 "3년 동안에 무려 200여 편의 시를 쏟아냈는데 그 중 60여 편을 선별해 <촛불의 꿈>을 편집했다"고 밝혔다.

행사는 나의 시집이 1부 서정시첩, 2부 성찰시첩, 3부 귀촌시첩, 4부 촛불시첩으로 꾸며진 것에 맞춰 4부로 구성되었다.

본인은 1부 서정시첩에서 '다시 문학을 위하여'를 낭송했다.

 

[인덕원에 있는 제주 흑돼지 전문점 돈사돈에서

버얼건 연탄불에 먹음직스런 오겹살을 구우며

그가 울부짖었다

문학은 죽었어 문학의 시대는 갔어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한탄이

뜨거운 연탄불 위에서 두 번 죽을 때

새로 나온 도수 낮은 소주

잔은 더 빨리 비워지고

취하는 속도는 예나 자금이나 같은데

그의 목소리는 아주 빠르게 탁해지고 있었다

시를 우습게 알고 소설을 읽지 않는 시대

죽은 사회에서 우리는 무얼 하나

분노의 잔과 잔이 부딪치고

핏대 높이는 목소리에 놀라

연탄불 더 붉게 타오를 때

어디 문학이 시와 소설 뿐이더냐

밥딜런도 노벨문학상 받았는데

노벨문학상을 거부하는 문인도 있지 않은가

값지기로야,받아줘서 고마운

언저리문학상이 훨씬 낫지

버티고 살아내는 것 자체가 문학 아니냐

등단한  사람만이 문학인이냐

등단하지 않고 글 잘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등단 심사하는 사람 자체가 함량 미달인데

등단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문학에 경계가 어디 있느냐

치열하게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다시 문학을 위하여 건배를 외칠 때

새로 나온 소주병은 어느새 비워져 있었다]

 

시낭송이 끝나자 사회자는 시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도 교육위원회가 주최하는 시조 짓기 어린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시조 제목은 <장마>였다 .

[장마는 장마는 심술쟁이 인가봐

공산당 먹구름이 쏜살같이 달려와

평화의 우리마을 울리고 갔어요

 

장마에 집잃고 엉엉우는 수재민

따뜻한 동포애로 우리 모두 도와주어

그들의 시름과 아픔 깨끗하게 치워요]

 

위 시조를 읽어주고 나는 이미 초등학교 4학년 때 등단했다고 하자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후 나는 물론 우리 또래가 다 그렇겠지만 반공에 세뇌되어 고등학교까지의 학창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했다.

이어 장윤진 피아니스트의 쇼팽 발라드 4번이 연주되었다. 피아노가 연주되는 동안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문학과 음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문학과 음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예술장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거하는 장면이었다.

 

2부 성찰시첩에서 나는 <버티고 견디기>를 낭송했다.

 

[우람하게 서 있는 저 산만 버티는 것이 아니다

도도히 흐르는 저 강만 견디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들 버티고 견디며 살아낸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일어서는 것이 인생

푸르던 잎 모두 떨구고 옷 벗은 나뭇가지

폭설 내리고 찬바람 몰아쳐도

끈덕지게 버티고 견디며 붉디붉게 산수유 열매 맺는다

아 생명이여, 숭고한 삶이여

오늘 하루도 살아내느라 힘들었을 당신에게

산수유처럼 쓰고 시고 짜고 단

안부를 묻는다

안녕 사랑해

인사할 수 있어어서 고마워]

 

시낭송이 끝나자 사회자는 나에게 성찰의 힘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2년전 땅끝 대흥사 일지암에서 열린 종삼음악회에 참가했을 때  주지스님 법인이 "인간의 육체를 예로든다면 뼈는 철학이고 피는 시이며 살(근육)은 산문(소설")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소개하고 내 생각도 같음을 설명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1981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윤한로 시인의 동시 <분교마을의 봄>의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즉석에서 낭송했다.

 

[우리 분교마을엔

산너머 너머 언니가

가는 체로 쳐보낸 고운 바람

 

사택 울타리엔

노란 봄

 

먼 산엔

붉은 봄

 

하늘엔

뻐꾹 봄

 

손등엔

쓰린 봄

 

내 마음엔

산너머 너머 언니가

튼 손 씻어주던

아직도 작년 봄]

 

콘서트는 세계적인 성악가 박소은 소프라노의 노래로 이어졌다. <동심초> <불처럼 뜨거운 내 입술의 키스>를 객석을 오가며 부르자 관중들이 환호했다.

 

3부 귀촌시첩에 이르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고구마를 캐면서>를 낭송했다.

 

[지난 봄 가녀린 줄기로 땅속에 묻혔다

어둠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수많은 고난고 역경 딛고 생명줄 놓지 안았다

번개 천둥 비바람 몰아쳐도

뙤약볕 쏟아져 대지가 메말라도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

마침내 척박한 땅속에 뿌리박고

희망 한무더기 잉태했다

오죽하면 그러랴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걸핏하면 삶을 포기하는 인간들과 달리

희망의 끈 놓지않고 끈덕지게 버티고 또 버텼다

후두둑 알 밤 떨어지는 가을이 오고

땅 위에서 평화 번영의 울림이 커지는 동안

땅속에선 구황의 희망 자라

첫서리 내리는 시기

붉은 알몸으로 세상에 나오니

생각과 달리 세상은 온통 아비규환이구나

그러나 어떠랴

누군가의 입을 구황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보람 어디 있으랴]

 

사회자는 내게 귀촌을 결행한 이유와 산촌에서 느끼는 생명력의 실체에 대해 질문했다. 사실 나는 귀촌을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부모님은 22년전에 반년 간격으로 소천하셨다. 아내와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노후 생활은 산촌에 가서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연로하신 장인 장모가 계시는데 처남이 쭉 모시고 살았으니 이제 우리가 모시고 살자는데 의기투합 했다. 물론 도시생활 보다 불편한 점은 많을 것이었다. 문화생활을 하기도 어렵고 병원도 가까이 있지 않아 연로하신 장인과 장모를 모시는 일도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도 자연의 한부분이지 않은가. 하늘과 땅, 산과 들, 계곡, 바람,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산새들과 어울려 살면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고구마를 캐면서>의 낭송이 끝나고 김성일 바리톤이 성용원 작곡가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청산에 살리라> <나는 거리의 만물박사>를 불렀다. 객석을 다니며 "피가로"를 외칠 때 객석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이어서 <촛불 2, 겨울 공화국에 내리는 비>를 낭송했다.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 위에

찬 겨울비가 내립니다

계절은 바뀌어

가을을 지나 겨울의 한복판

동짓날 긴 밤에

촛불의 마음과 마음을 적시는

찬비가 내립니다

정치에 농락당해

울분에 젖은 마음 위로

희망의 싹을 틔웁니다

혹한의 계절이건만

가슴에 품은 희망의 촛불 타올라

찬 겨울비를 데워

식어가는 마음을 덥히고 있습니다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 시간에도

국민을 모욕하는 뉴스는 넘치고

국민의 힘을 누르려는 음모도 넘치지만

부득부득 나를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은 살아

울분에 젖은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행여 이 비에 촛불이 꺼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겨울비에 젖고 있습니다]

 

낭송이 끝나자 사회자는 나에게 '촛불'의미를 물었다. 촛불의 의미를 애기하려면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멀리는 임진왜란에 앞서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야겠지만 100여년 전의 근현대사만 살펴보더라도 우리의 근현대사는 민중들의 처절한 항거의 역사였다. 1894년 갑오년으로 거슬러가보자. 고부군수의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농민들이 죽창들고 압제에 항거한 것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실패로 끝난 동학농민전쟁에 이어 일제는 한반도를 강탈했다.

식민지 통치 속에서 1919년 자주독립의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3.1운동이다. 당시 국민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거대한 물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이했으나 우리 민족은 또 외세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남북한이 각기 다른 정부를 세워 국가운영에 들어갔고 남한 만의 단독 정부를 세웠던 독재정권은 1960년 4.19 혁명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 때는 '짱돌'을 들고 정권을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1980년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 6.10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때는 화염병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신종 무기 소위 꽃병이었다.

드디어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이른 봄까지 연인원 20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촛불의 힘은 정권을 바꿨다. 촛불혁명을 달성한 것이었다. 당시 촛불의 꿈은 적폐청산, 평화, 번영, 통일이었다. 정권이 바뀌는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촛불의 꿈'은 아직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

근현대사의 도도한 물줄기는 죽창에서 태극기로 짱돌-화염병-촛불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을 발전시켜왔다. 이런 민의의 발전 속에서도 정치권은 아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화이다. 정치권은 나무로 치자면 줄기와 뿌리는 내팽개치고 나뭇가지만 붙들고 아귀다툼의 아전인수 싸움을 펼치고 있다. 촛불이 명령한 적폐청산은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적폐들의 난동에 마구 흔들리는 형국이다. 가령 적폐의 대명사인 검찰을 개혁하려면 옥상옥 이중구조인 검찰을 없애야 하는 것 아닌가. 검찰이 하는 역할을 경찰이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같은 이중구조 옥상옥의 정부조직은 검찰외에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다. 국민체육진흥공단, 복권위원회, 한국마사회 ......등이 있는데 옥상옥으로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를 두어 국력을 소진하고 있다. 검찰, 사감위만 없애도 국가예산을 엄청나게 절감할 것이며 절감한 예산을 국민 복지에 쓸 수 있다면 대한민국이 훨씬 더 행복하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촛불의 꿈'은 적폐청산, 평화, 번영, 통일인데 이런 큰 줄기는 내팽개치고 곁가지 붙잡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한심스럽고 안타깝다. 정작 유럽 등의 사회주의자 입장에서 본다면 대한민국 정치권의 아귀다툼은 우파끼리의 싸움이다. 진정으로 사회의 안정을 바라고 세계의 평화를 지향하며 인류의 번영을 달성하고 민족의 통일을 원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권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당초 '촛불의 꿈'을 생각하는 거대한 담론을 펴쳐주길 바란다.

아주 작은 몸짓이지만 이것이 '촛불의 꿈' 북콘서트를 시행하게 된 이유다. 북콘서트를 마치면서 정치권의 곁가지 붙잡고 아귀다툼을 벌이며 국민들에게 편가르기를 강요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역사를 증거하는 소회를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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