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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만 칼럼 – 오늘맑음] 돌아온 탕자

임순만 언론인·소설가
  • 입력 2019.12.30 11:47
  • 수정 2020.02.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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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형편 때문에 집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누구나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 선물을 가득 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할까. 사랑이 있고, 평화스럽고,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휴식이 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포근함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고 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것은 인간 누구나의 소망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 즉 ‘탕자의 귀향’에 대한 것이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되풀이해 강조하거나 해석하는 ‘비유 중의 비유’이다. 목회자 중에서 이 비유를 들어 설교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역사적으로 숱한 문학가와 미술가들 작품의 모티브가 되어왔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어떤 사람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다. 자신의 몫을 달라고 부친을 졸라서 재산을 먼저 받은 둘째는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결국 비참한 돼지치기로 전락했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머슴 생활이라도 하며 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둘째가 멀리 모습을 나타내자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며 새 신을 신겨준다. 살찐 송아지를 잡아 축제를 베풀어준다.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맏아들은 이를 보고 자신은 열심히 일했으나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은 아들을 얻은 것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알려준다. 여기서 집 나간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는 아버지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불교의 법화경에도 나온다.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아들은 매우 빈궁하여 사방으로 의식(衣食)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아들을 찾아 오랫동안 다녔으나 만나지 못하고, 한 성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빈궁한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성에 이르게 되었다. 늘 한탄을 하며 아들을 만나기를 빌었던 아버지는 빈궁한 젊은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채지만, 아들은 그가 무서운 권력자라고 생각해 도망을 친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보내 아들을 데려다가 일을 가르친다. 착실하게 일을 배운 젊은이에게 아버지는 임종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아비임을 밝히고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 아들은 ‘미증유’함을 얻어서 바라는 마음이 없었는데 보배 창고를 얻게 됐다고 기뻐한다. 여기서 아버지는 부처님이고, 거지 아들은 중생이며, 많은 재산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비유라고 한다.

탕자의 이야기에 대해 잘 알려진 미술작품으로는 네델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탕자의 귀향’이 있다. 초기에 그룹초상화로 이름을 얻은 렘브란트는 말년에 들어 자신을 탐색하거나 응시하는 듯한 초상화 백 여 점을 그렸다. 그 후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탕자의 귀향을 그렸다.

렘브란트는 중년에 큰돈과 명성을 얻었으나 중년 이후 아들과 두 딸을 잃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고, 그 후 함께 살던 여성은 정신병원에 갇혔다. 재물과 명성을 모두 잃었다. 열광적인 미술품 수집과 규모 없는 생활로 파산을 당했다. 그는 소망, 재물, 체면, 가족, 자신감 등 모든 것을 잃고 나서 등장인물을 실물 크기로 그린 높이 2.5m짜리 대작 <탕자의 귀향>(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을 남겼다. 고통과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분위기를 가진 이 작품은 잘 나가던 시절에 그릴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모든 비극을 다 겪고 나서 렘브란트는 돼지 울안에서 생활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탕자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1869~1951)와 네델란드 신학자 헨리 나우웬 (1932~1996)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1869~1951)와 네델란드 신학자 헨리 나우웬 (1932~1996)

 

하버드대 교수를 지냈던 네델란드 신학자 헨리 나우웬(1932~196)는 이 그림을 분석하는 동명의 명저를 출간했다.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그는 사는 것이 고통스러워 아무런 것도 할 힘이 없을 때는 렘브란트나 고흐의 그림들을 감상했다고 한다. 이들 거장의 삶과 예술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상처를 싸매고 다독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우웬은 어둠과 빛의 대비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탁월하게 표출했던 렘브란트 그림의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자신에 대입해가며 깊은 성찰을 얻어냈다.

아버지의 표정
아버지의 표정
아들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
아들을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

이 그림에서 거의 눈이 멀다시피 한 아버지는 아들을 보아서가 아니라 어루만져서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본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진솔한 방법이다. 인간 사랑의 첫 경험은 어루만짐에서 얻어진다. 토론을 통해서, 또는 어떤 말을 듣고 사랑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그 사람을 깊이 어루만진다.

인간을 가장 인간적으로 느낄 때에는 언제나 손이 사용된다.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만날 때 그는 상대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어떤 원망과 분노도 없다. 맹렬함과 도전도 없다. 정성과 상대에 대한 따뜻한 이해가 있을 뿐이다.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면 두 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손은 우락부락하게 힘 센 남자의 손이고, 오른손은 섬세한 여자의 손이다. 고통을 이해하는 아버지의 손이고, 위로와 사랑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발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발

 

이 그림은 뜯어볼만한 것이 참 많다. 어루만지는 아버지의 손과 다 떨어진 신발마저 벗겨진 아들 발의 대비 또한 감동적이다. 먼 길을 걸어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아들의 발은 처연하다. 서양화의 전통에서 남자가 맨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엄청난 수치를 상징한다. 아들의 불효를 심장으로 끌어안아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다. 눈이 거의 먼 아버지와 그의 심장 바로 아래에 이마를 대고 있는 아들의 표정 또한 기가 막힌 대조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표정은 깊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아들은 사랑으로 가득 찬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는다. 아들이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은 그래도 그가 좋은 가문 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은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것을 주시하는 오른쪽 세 사람의 눈길도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맨 오른쪽 붉은 옷과 화려한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들고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형의 표정은 렘브란트가 특히 잘 다루는 명암대조법으로 질투와 시기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방황은 집을 나가 떠도는 것이고, 귀향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다. 집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지혜와 보호가 있다. 부모는 낳아서 기르고 가르쳐준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에게 영원한 것을 주려고 한다. 가정은 구성원들에게 원초적인 힘을 주는 본향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가정을 천국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달리 주목해 보고 싶은 작품이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라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돌아온 탕자를 통해 역설적으로 넓은 사고의 지평을 보여준다. 집을 떠나는 사람을 축복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돌아온 탕자인 둘째 아들을 중심으로 부모와 첫째 아들, 그리고 셋째 아들 등 5명의 가족이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은 탕자가 왜 집을 떠났는지를 묻는다. 그의 동생만이 반대로 왜 집으로 왔는지를 질문한다. 둘째는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에게 아버지 집으로의 귀환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광야에서 견딜힘과 용기가 부족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견딜 수만 있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집을 떠난 이유는 내면의 소리를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온함과 안전한 일상의 전통적인 삶보다는 모험과 내면의 갈등에 충실하고 싶었다. 자신의 죄성(罪性)을 억제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길을 떠났다가 실패해 돌아왔고, 집을 떠나려하는 동생을 위로하며 격려한다. “자, 그럼 내 동생 한번 안아볼까? 너는 내가 품었던 희망들을 다 갖고 떠나는 거야. 강해지거라. 가족도 잊고, 나도 잊어. 너는 다시 되돌아오지 마라.”

네델란드 화가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 ‘돌아온 탕자’ (1629)
네델란드 화가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 ‘돌아온 탕자’ (1629)
스페인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돌아온 탕자’(1667~1670)
스페인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돌아온 탕자’(1667~1670)
이탈리아 화가 폼베오 바토니 ‘돌아온 탕자’(1773)
이탈리아 화가 폼베오 바토니 ‘돌아온 탕자’(1773)
이탈리아 화가 살바토르 로사 ‘돌아온 탕자’ (1651~55)
이탈리아 화가 살바토르 로사 ‘돌아온 탕자’ (1651~55)

우리는 안락함을 떨쳐버리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정직하게 반응해 길을 떠나려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러나 탕자는 힘과 용기를 잃고 무력하게 돌아온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의 길에 놓여있는 여러 갈등과 한계에 대해 아파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은 전통에만 안주하지 않는 이들에게 격려와 애정을 보낸다. 이 또한 가족을 사랑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누구는 가족을 떠나고, 누구는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탕자에게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유한한 삶을 사는 동안 거듭 죄를 짓는 인간에게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그러한가. (*)

렘브란트의 초상화들
렘브란트의 초상화들

임순만 소설가·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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