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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140] Critique: Piano On 삼모아트센터 피아노 페스티벌 - 한국의 소리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19.12.27 10:48
  • 수정 2019.12.2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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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이혜경 교수가 그녀의 제자들과 함께 이끌고 있는 Piano On의 정기연주회가 이번엔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만을 모아 '한국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삼모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날 같이 하기로 한 멤버인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 갑작스레 입원하는 바람에 그녀가 연주하기로 한 2곡이 빠져 1930년부터 1986년까지의 반세기를 넘은 한국 작곡가들의 총 다섯 곡의 다양한 피아노 음악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좌로부터 중앙대 피아노곽 이혜경 교수, 유지현, 문보미, 최민혜 피아니스트

음악회에 같이 간 동행의 지적은 뼈아팠다. 일단 45년 만의 클래식 음악회 방문이라고 했다. 그런 분이 일반 독주회 레퍼토리도 아니고 한국 창작 피아노 음악회에 온다고 하니 반가움보단 우려가 들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자기만의 시선과 잣대로 음악회를 체험할 테니 말이다. 차라리 근 반백년만의 클래식 음악회라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이나 모차르트, 쇼팽의 프로그램이 친근할 텐데 그거 대신 오늘을 선택한 건 부제인 '한국의 소리'에 이끌려서였다고 한다. 한국 창작 피아노 곡이 듣고 싶어서 온 그분의 첫 번째 일갈은 '아리랑의 미 극복'이다. 아리랑, 새타령, 새야 새야 등의 익숙한 민요를 기반으로 서구식 피아노 음악으로 활용한 것뿐이며 결국은 소재가 아닌 음악회 제목처럼 '한국의 소리'에 입각한 정서적 표출의 실패화 한계를 노출, 참신하지도 대중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획력의 부재다. 관객, 사람이 찾지 않는 음악회는 대중의 기호와 입맛에 실패했다는 방증이요 그럼으로 상업적인 활로를 개척하고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는 기획자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다.

피아노 온 정기연주회, 한국의 소리 포스터

우선 아리랑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선 한국 창작음악, 더 나아가 생활양식, 의상, 주택, 정신 등 '한국적'이라는 정체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보편성과 세계성을 띤 한국적인 콘텐츠의 창출은 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분발이 요구된다. 두 번째 기획력의 부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대한민국에서의 순수예술을 성토할 때 등장하는 단골 멘트 '대중성과 소통 부재다'. 클래식과 트로트는 장르의 구분이긴 하지만 엄연히 음악적 이상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시장의 규모가 비교불가다. 그건 인위적으로 생성된 게 아니라 사람들의 기호다. 클래식 음악은 우리 것이 아닌 외래, 소수의 음악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에서의 감상 인구는 거의 없다. 교육과 설득, 회유 등으로 억지로 좋아하게 만드는 데 한계가 있고 태어날 때부터의 가지고 있는 DNA 문제다. 그런데 복잡다단한 세상은 연주자, 예술가에게 생계를 해결해야 일상의 과업으로 결국엔 엔터테인먼트요 작품성의 추구가 아니라 대중과의 호흡이요, 고립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

천고의 길을 걷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혜경, 그녀의 길을 존중하고 지지한다. 그 기개가 꺾이면 안된다. 예술의 길은 원래 고독하기 때문에......

그럼 왜 이 어려우면서 고독한 예술적 길을 가야만 하는가?

예술은 포퓰리즘과 정치, 경제적 역학관계에서 벗어나 독립해서 인간의 예술세계를 존중하고 인간이 만든 독창적이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스며 있는 음악을 듣고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하고 살아가는데 양분이기 때문이다. 순수예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당장의 이익을 중시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지지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보완하는 가장 중요한 대안 중 하나인 사회적 관계 회복이 가장 필요한 분야이다. 당장 인기가 있어서 문화 소비자들에 의해 시장메커니즘이 지탱될 수 있는 대중예술과는 달리 단기적 대중성이 낮고 성과나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순수예술은 그 자체의 사회적 중요성과 명분에 대한 자발적이고 순수한 공감과 존경이라는 선의에 기반한 도움과 기여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통영의 나전칠기 장인에게 왜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지게 과거의 방식대로 지금은 쓰이지도 않는 걸 생산하냐는 발언은 1명이라도 나전칠기 그대로의 가치를 알고 효용성을 논하기 전 존중과 보존하면 된다. 클래식을 알리겠다고 클래식 음악인을 위한 무대를 만든답시고 열린음악회 류의 백화점식 종합선물세트는 최악이다. 본질이 다른 것들을 마구 한 상자에 집어넣고 구색 맞추기 끼워 넣기에 불과하며 클래식 음악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관객들의 호응이 좋고 박수가 많이 나오는 대중들이 아는 노래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다람쥐 쳇바퀴 굴리는 매번 같은 걸 반복할 수밖에 없다. 태진아 나온 다음에 성악가가 오페라 아리아 부르고 김성수와 같이 '동행'을 부른다. 그럴수록 클래식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부수적이 되어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꼴이다. 열린 음악회 같은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해 클래식 감상 인구가 늘었다는 징조는 없다. 클래식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매체 아니어도 음악에 빠지게 되어 있다. 플랫폼과 방식의 차이다. 그냥 일순간의 자극, 지나감에 불과하다. 뭐든지 원형에서 멀어질수록 원형의 가치를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연주자의 지명도는 다른 차원의 문제겠지만....

감상 소감은 누구나 다를 수밖에 없다. 막연한 감상이 아닌 작곡가의 작품을 한음한음 인식하고 지각하는 진정한 감상자가 일당백이다. 필자도 작곡가로서 나의 음악, 나만의 독자적인 예술을 지향하며 내 음악에 공감하고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원한다. 속세를 초월한, 틀을 벗어나 절대 고독의 완전한 개인적 자아며 그래서 작가적 고독은 숙명이다. 예술가의 삶이란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역사기 때문이다.

음악회가 끝나고 관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피아노 온 멤버들
음악회가 끝나고 관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피아노 온 멤버들

창작곡에 대한 애정과 보급이라는 시대정신을 가진 연주자의 위촉이 지속적인 창작곡 발표의 자양분이다. 연주자가 존재하는 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위해서다. 보존과 계승은 연주자의 막중한 숙명이며 책임이다. 한국에 이렇게 지원금이나 운영비 지급을 위한 수단 말고 창작곡에 깊은 관심과 사명을 가지고 위촉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연주자가 과연 몇 명이나 있는가. 그래도 이혜경이란 피아니스트가 있어 한국 음악계가 자존심을 세우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녀의 제자들인 중앙대학교 출신 피아노 온(Piano On) 멤버들, 유지현, 최민혜, 문보미 피아니스트에게 감사인사를 올린다. 별로 그들의 캐리어에도 도움이 안 되면서 연습만 많이 해야 하고 까다롭기만 한 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고생이 작심할 터. 현대곡이나 한국 창작 피아노 곡에 개인적인 흥미 유무를 떠나 프로그램의 구성과 멤버로서 힘을 합해 추운 겨울 땀이 나도록 노력한 모습이 선하다. 이들과 오랫동안 함께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작곡가들의 소망이다. 끝으로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자신의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그 순간을 보고 언급한 프리다 칼로(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의 독백으로 이번 평을 마친다.

이것이 내가 자유로워지는 방법이구나. 여행도 갈 수 있겠어. 이제 타인에게 손을 빌리지 않고도 사고 싶은 걸 사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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