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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벌꿀 Honey

박인 작가
  • 입력 2019.12.20 11:35
  • 수정 2020.02.1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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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방문을 알리는 문자가 뜨고 H가 왔다.
나는 상상으로 그리던 H의 엉덩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H는 노란색 하이힐을 신고 내게로 왔다.
교통사고로 다리뼈에 금이 가는 상처를 입어 나는 정형외과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죽음의 문 앞까지는 가 보지 못했지만, 병원 침대에서 오래 살다 보면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떡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나는 깁스를 한 발목으로 절뚝이며 걸었다.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가슴 한구석을 채운 허전함이 발목 통증보다 더 아프고 쑤셨다. 주삿바늘도 진저리나게 싫었지만 외로움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간절히 원한다고 사랑이 찾아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맨몸뚱이만 남은 나는 외로웠다.

▲나는 벽에 그려진 하트처럼 퇴색되고 잊혀가는 H를 추억한다. ⓒ박인
▲나는 벽에 그려진 하트처럼 퇴색되고 잊혀가는 H를 추억한다. ⓒ박인

H가 병실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석고붕대를 감은 발목을 허공에 매달고 있을 때였다. 전시회 마감 날짜가 코앞이었다. 마무리 손길을 기다리다 내게서 버림받은 내 작품들이 화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었다. H는 3년 전에 화실에서 내 가르침을 받던 학생이었다. H가 문을 열었고, 태양이 지고 있었다. H는 내 심연으로 빛을 몰고 왔다. 침대 옆에 무릎을 모은 H는 내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따뜻했다. 전기가 흐른 듯 오금이 저렸다. 천사에게 세례를 받는 기분이랄까.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퇴원하자마자 나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품을 마무리 짓느라 H를 거의 잊고 있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야 하나. 작업실 방문을 알리는 문자가 뜨고 H가 왔다. 드디어 H는 내가 연출한 인생에 찬조 출연한 것이다. 그녀는 주로 손수 만든 쿠키나 케이크를 들고 왔다. 몸과 마음은 원래 하나라 했던가.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갔다. 그런데 몇 차례 연애에 지친 나는 마음은 가는데 몸이 따로 놀았다. 몸이 달아오르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원래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건강해 보여요. 부러진 다리는 어때요?
H는 웃옷을 벗고 더운지 손부채질을 했다. 블라우스 옷깃 사이 봉긋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발목 위로 다리 근육은 넓적다리를 수직으로 가로질러 올라붙은 탱탱한 엉덩이와 만나고, 그녀의 볼륨 있는 상체 위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서서 작업하면 아직 많이 아파요.
나는 말했다.
-제가 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요? 뭐든지 힘껏 할게요. 부탁만 하신다면.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H는 웃었고 청바지 지퍼를 내리고 다리를 번갈아 빼냈다. 블라우스 단추가 반쯤 풀리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벌꿀이 묻은 듯한 H의 입술과 넓적다리를 바라보았다.

몸과 마음을 분열시키는 그런 피곤한 사랑을 나는 거부했다. H하고는 육체적 사랑에 매진할 것이었다. 물론 힘이 부칠 때까지만. 블라우스를 거칠게 벗긴 나는 H의 허리를 잡았다. 손가락은 엉덩뼈로 미끄러져서 들어갔다. 나는 상상으로 그리던 H의 엉덩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갈비뼈가 내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마른 갈빗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일까. 나는 느꼈다. 12쌍 갈비뼈에 둘러싸인 그녀 흉곽을 통해 빠져나오는 바람 소리는 어찌 들으면 꿀벌의 잉잉대는 날개 떨림 같았다.

작업실에 딸린 내 방에서 H는 요리했고 청소를 했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듯이 육체적 사랑에 집착했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머리맡에 구운 쿠키들이 접시에 있었다. 떠나기 전, 작업실 벽에 육각형 벌집 모양을 그린 H는 그 안에 노란색 하트를 심어 놓았다. 발목이 아프다고 너스레라도 떨면 식탁에는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녀는 천사였다. 내 발목이 완전히 회복되자 그녀는 떠났다.

앞으로 그런 사랑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가끔 나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돌보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면 질투에 사로잡히곤 했다.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벽에 그려진 하트처럼 퇴색되고 잊혀가는 H를 추억한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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