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항일투쟁, 최대 여성투쟁, 자주독립-민주 보루 지켜야
제주해녀 항일투쟁, 최대 여성투쟁, 자주독립-민주 보루 지켜야
  • 김홍국 칼럼니스트
    김홍국 칼럼니스트 archomme0@gmail.com
  • 승인 2019.12.0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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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3년, 당당한 여성의 힘 보여줘

'해녀'는 산소탱크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가리키며, 제주해녀가 가장 대표적이다. 전 세계에서 제주와 울릉도, 일본 일부 지역에 분포하며, 201612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75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는 등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소중한 여성 중심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국제학술회의 토론을 통해 평화의 섬 제주도가 자주와 저항, 독립과 민주주의의 핵심 역할을 해온 역사를 자각할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해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기보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제주 올레길과 제주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널리 홍보하고 알릴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제주도 해녀 항일투쟁에 대한 연구와 진단이 여성독립운동사와 한국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넘어서서 세계사를 빛낸 역사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심층적인 연구와 이를 세계사적인 규모와 수준으로 확대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국제학술회의 토론을 통해 평화의 섬 제주도가 자주와 저항, 독립과 민주주의의 핵심 역할을 해온 역사를 자각할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해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기보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제주 올레길과 제주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널리 홍보하고 알릴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제주도 해녀 항일투쟁에 대한 연구와 진단이 여성독립운동사와 한국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넘어서서 세계사를 빛낸 역사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심층적인 연구와 이를 세계사적인 규모와 수준으로 확대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여싸, 져라져라, 이여도사나, 이여사나노동요 물질

제주 해녀들은 전 세계를 통틀어 독특한 일 방식과 삶의 양식, 그들만의 집단문화로 주목을 받아왔다. 이들은 산소탱크와 같은 기계장비 없이 잠수복과 오리발, 마스크 등을 착용하고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한다. 과거에는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불렸지만, 지금은 해녀로 불린다.

이같은 문화적 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세계인들의 자각이 커지면서 201611제주 해녀문화(Culture of Jeju Haenyeo)’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당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개최한 제11차 회의에서 제주 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던 것이다.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문화는 물질잠수굿’, ‘해녀노래등을 총체적으로 포함한다.

물질은 해녀들이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를 말한다. 잠수굿은 위험한 물질 작업을 하는 해녀들이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굿이다. 해녀노래는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러 나가면서 부르는 노동요다. 해녀 여럿이 돛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갈 때 노를 저으며 부른다. 파도의 세기에 따라 이여싸, 져라져라, 이여도사나, 이여사나등의 후렴구가 붙는 것이 특징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해녀 문화는 초기에는 생업수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인 1105(숙종 10) 탐라군(제주도)에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렸던 기록도 발견된다. 조선시대인 1628(인조 6) 제주도로 유배된 이건(李健)이 쓴 한문수필 제주풍토기에도 해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건은 글에서 "잠녀(潛女)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낫을 들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한, "남녀가 뒤섞여 일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기록했다. 당시까지는 남녀 구분없이 물질을 했으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여성들만 일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1702(숙종 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채색화 탐라순력도에도 해녀가 등장한다. 탐라순력도중 취병담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屛潭泛舟) 편에는 지금의 제주시 용두암 근처에서 작업복을 입고 잠수하는 해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70년대 14천명, 20183,898, 205명 불과, 급속 감소

해녀들은 7~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물질을 생활에서 배웠으며 15~17세 정도에 독립된 해녀가 된다. 해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는 40세 전후로, 대개 60세 전후까지 해녀 생활을 한다.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물질이라 불리는 잠수 작업은 주로 봄에서 가을까지 이루어진다. 물질은 바닷가에서 하는 갓물질과 여럿이 배를 타고 나가서 하는 배물질이 있다. 작업은 하루에 3~4시간 정도 진행한다. 대개 수심 5m 정도에서 작업하지만, 때때로 수심 20m까지 들어가 2분 이상 잠수하기도 한다. 작업할 때는 중간에 2~3차례 휴식을 취해야 한다. 기량의 숙달 정도에 따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 해녀로 구분한다. 상군 해녀는 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장비는 크게 물옷과 물질 도구로 나뉜다. 물질 도구에는 테왁과 망사리, 빗창, 정게호미, 갈고기, 소살, 눈 등이 있다. 테왁은 부력을 이용해 해녀들이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기구다. 망사리는 자루 모양으로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망으로 테왁에 부착해 사용한다. 해산물을 채취할 때는 빗창과 정게호미가 쓰인다. 빗창은 30가량의 무쇠칼로 바위에 붙은 전복 등을 캘 때 사용한다. 정게호미는 미역 등 해조류를 베는 낫이다. 조개와 같은 어패류를 캘 때는 쇠꼬챙이인 갈고기와 1m 가량의 작살인 소살을 사용한다. 눈은 방수경으로 족쉐눈과 쉐눈, 눈곽 등이 있다. 족쉐눈과 쉐눈은 해녀들이 물질할 때 끼는 작은 물안경이다. 알이 2개면 족쉐눈, 1개면 쉐눈이라 한다. 눈곽은 물안경을 보관하는 네모난 상자다.

물옷은 해녀가 입는 작업복이다. 과거에는 무명으로 만들었으나 현재는 고무 잠수복이 쓰인다. 전통적인 재래작업복은 상의에 해당하는 물적삼과 하의에 해당하는 물소중이로 구분한다. 머리에는 물수건을 착용해 물 속에서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았다. 재래식 물옷 대신 고무 잠수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고무 잠수복은 모자와 상의, 발목부터 가슴까지 올라오는 하의, 오리발로 이루어진다. 고무 잠수복을 착용하면서 해녀의 작업시간도 3~5 시간으로 늘어났으며 바닷속 20m 정도까지 물질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수심 깊은 곳에서 작업하면서 잠수병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사례도 있다. 제주도는 2012년 무렵부터 선박과의 충돌 등을 방지하고 사고 발생 시 조속한 구조를 위해 주황색 잠수복을 해녀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제주 해녀들은 19세기말부터 전국의 여러 해안으로 출가(出稼) 조업을 나갔다. 객주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랴오둥 반도의 뤼다(大連), 산둥 성의 칭다오(靑島)까지 나갔다. 1920년대부터 8·15해방까지 일본 각지에 약 1,500, 한국 본토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2018년 기준 활동하는 해녀의 수는 3,898명으로, 1970년대의 14,143명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미치지못해 지속적으로 줄어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지역별로는 제주시에 2천여명, 서귀포에 1천여명이 분포하고 있다. 연령별로는 70대가 가장 많으며 60, 50대가 그 다음이며, 30~40대는 75, 20대는 5명에 그치고 있다. 해녀문화는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국가무형문화재들처럼 특정 보유자나 단체를 별도로 지정하지 않고 있다.

 

일제 수탈 항거한 제주해녀 강력투쟁, 문명사적 연구 필요

지난 1129일에는 제주에서 제주 해녀 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3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려 제주해녀 문화의 현실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특히 일제강점기 기간에 일본의 수탈과 강압에 맞서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로서의 해녀 문화가 조명되면서, 한국사회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해녀들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함을 입증했다.

제주도 해녀 항일투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녀 항일투쟁의 발단은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어용화와 해산물 매수가격을 둘러싼 부정 때문이었다. 해녀들의 투쟁은 공동판매 때 가격사정, 동급검사, 해녀조합의 부정으로 인한 불만이 계속된 가운데,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19309월 투쟁, 11월 제주도 해녀조합에 대한 격문살포 등 점점 더 구체적이고 규모가 확대됐다.

이같은 부정한 관행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 해녀들이 모여 19321월 첫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19321월의 해녀투쟁은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투쟁이었다.

1931년 당시 구좌면 하도리에서는 해산물 판매를 둘러싸고 해녀조합의 부정이 거듭되면서 해녀들의 피해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그 전부터 해녀어업조합에 대해 불만을 품어왔던 해녀들은 분개하여 일차로 항의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조합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구좌면 해녀들은 해녀조합의 비리를 폭로하고 요구조건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당시 제주도 해녀들은 관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해녀회의 활동은 해녀들이 밀집한 구좌면과 성산면 일대에서 활발했다. 마침내 193217일과 12일 구좌면 세화장터에서는 세화주재소 경찰의 저지를 뚫고 1,000여 명의 해녀들이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해녀들은 대표를 선출하여 해녀어업조합의 운영권 확보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마침내 제주도사(濟州道司)로부터 5일 내 요구대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약속을 파기한 제주도 정부는 해녀시위 이후 일제는 주동인물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을 벌였다. 주모자로 파악된 해녀 20여 명과 그 외 청년 수십 명이 검속되었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과 구좌면 주민들은 검거자 탈환 투쟁을 전개했다. 126일에는 800여 명의 해녀들이 일제 경찰과 충돌하는 등 투쟁이 계속되었으나 다수의 구속자를 내면서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사건으로 검속된 사람은 많았지만 최종적으로 구속된 사람은 해녀대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3명이고 이들도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제는 해녀시위의 배후 조직으로 제주도 조선공산당재건조직(일명 제주도 야체이카)을 지목하여 강창보를 비롯한 100여 명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해녀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일제는 해녀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정판매제는 폐지하고 공동판매를 부활하였으며, 주정조합 서기 및 지정상인을 10년간 조합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50세 이상의 해녀와 미성년자에게는 출가시 조합에 내는 수수료를 면제했다. 1932년의 해녀투쟁은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어민투쟁 중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최대의 여성투쟁이었다.

이날 기조연설을 한 김삼웅 제주4·3진상규명위원회 중앙위원은 기조연설 제주도 자주정신과 항일투쟁의 사력(史歷)’을 통해 해녀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했다.

김 위원은 제주도는 환경적인 거센 풍랑과 척박한 농토, 육지에서 내려온 탐관오리들의 수탈 등이 복합적 요인이 되고 여기에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유배자들의 저항정신이 문화적·사상적 저항의 자양분으로 작용해 침탈과 외세지배를 용납하지 않은 투쟁으로 나타났다고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걸쳐 일어난 제주의 자주·저항운동에 대한 맥락을 설명한 뒤, “1932년의 해녀투쟁은 일제강점기에 일어났던 어민투쟁 중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여성투쟁이었다. 당시 완고한 유교문화권 속에서 여성들이 차디찬 물에 뜨거운 열정으로 뛰어들었던 것은 세계 문명사적으로도 드문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 위원은 지역을 아끼고 조국을 지키려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단순히 생활수단을 이어가려던 문화라는 것을 넘어 문화·문명사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역시 발제를 통해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시대변화 속에 여성의식변화를 주도한 최대 규모 여성 항일운동이라는 점을 들어 제주해녀 수천 명의 행진은 외세탄압과 경제수탈에 대한 당당한 요구였고 여성 주체의지를 보여준 사례라며 지역사의 관점을 넘어 한국여성독립운동사, 세계여성사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산티아고길보다 제주올레길 찾아 우리 문화 자각 계기 삼아야

필자 역시 토론자로 참석해 제주도 해녀 항일투쟁이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여성운동으로 과거 홀로코스트, 볼세비키혁명, 레지스탕스운동 등에 나타난 여성운동 및 근우회 등 항일여성운동, 하와이와 만주, 시베리아 등에서 펼쳤던 여성독립운동과의 비교연구의 필요성이 크다며, , 문학, 음악, 미술,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다양한 스토리텔링 기법과 유튜브 및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전 국민과 세계에 그 중요성을 알릴 필요가 크다고 제언했다. 또 평화의 섬 제주도가 자주와 저항, 독립과 민주주의의 핵심 역할을 해온 역사를 자각할 필요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해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기보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는 제주 올레길과 제주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도록 널리 홍보하고 알릴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제주도 해녀 항일투쟁에 대한 연구와 진단이 여성독립운동사와 한국독립운동사의 지평을 넘어서서 세계사를 빛낸 역사적인 투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심층적인 연구와 이를 세계사적인 규모와 수준으로 확대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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