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자신없고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는 한밤중에 자신을 불러낸 동영상 제작자가 주머니에 복권 탄 돈을 갖고 있는 건 알지 못했다.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상대가 복권 일등에 당첨된 자이며 주머니에 상금 일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직도 영화를 준비 중이시냐’고 다소 비아냥거리는 투로 물어본 건데 감독은 영화가 무산된 이유를 배우의 부상 탓으로 돌리고는 앞으로 찍겠다 말겠다 그런 이야긴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안 하니까 장화자가 보기에 이 작자가 상당히 건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영화를 찍는답시고 갖은 배우 이름을 자기 집 개이름인양 불러대거나 유명 제작사 사장 이름을 수시로 들먹이거나 아트펀드에서 지분투자 들어오고 있으며 지방투자자들 또한 대거 올라오고 있다는 등 설레발을 쳐야 하는데 조용히 담화를 즐기듯 앉아 있으니 그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와 인간적 성숙이 있었는지 다소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감독이 보기에, 한 번 결혼했다 이혼했지만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장화자 양 앞에 있으니 풋내기들의 설익은 육체의 그런 옅은 냄새와는 냄새도 다르고 전해오는 입체감도 달랐다. 상당한 입체감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이 30대 여인의 존재감은 한밤의 스타박스 커피숍을 풍요롭게 하면서 또한 고객들에게 하나의 회화 느낌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저야 뭐 생각 중입니다”
생각 중이라? 생각이란 그 대상과 한계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감독이 폭이 넓어졌나 싶었다. 한계를 두고 있지 않다니. 몇 년 전만 해도 술자리에서, 대각선으로 앉은 그녀를 힐끔힐끔 보며 뭔가 초조해하고 애태우던 작자가 아니었나. 그런데 이토록 한가한 태도로 조용한 미소까지 띠며 커피잔을 한번씩 입가에 갖다대는 여유라니!
장화자는 여차하면 이 자식을, 이 자식이 내뿜고 있는 이 여유의 정체를 밝혀야겠다는 의지가 발동하였다. 그것이 돈이라는 생각은 아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작가의 처지나 능력으로 보아 실현가능성이 희박한지라 제켜놓고 있었다. 혹시 무슨 위자료라도 받았나. 보험금이라도 탔나 하는 정도였다. 복권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장화자를 마냥 커피숍에 앉혀 놓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여자란 앉은 자리에서 다섯 시간도 떠들 수 있는 존재란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여자와 대화를 길게 하는 것에 대해선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대화보다 다른 게 있지 않은가, 그 다른 걸 남자는 생각해 보았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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