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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21) - 여자의 인생관

서석훈
  • 입력 2010.07.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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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빈털터리 백팔만이 당나귀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는 그 시간에 마돈걸은 강남의 한 와인 바에서 아는 오빠인 유세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세련은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어학 연수 6개월로 모든 학업을 종치고는 청소부, 주유소 및 슈퍼마켓 종업원을 거쳐 교포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4인조 코리아 밴드를 이끈 끝에, 생활 영어와 국제적인 매너를 몸에 완전히 익히고 조국으로 돌아온 꽃미남 중년이었다. 한국에서는 재미사업가 행세를 하며 여자들로부터 몇 푼 뜯어 먹으며 생활을 영위하였다. 수차례 고소를 당하였으나 그때마다 합의를 보고 곤경을 벗어났는데 그 합의금을 마련해준 이가 또 새로운 여자들이었다. 유세련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나 명함에는 모 개발회사 상무 직함을 박아 넣고 다녔다. 꼭 필요한 순간에 명함을 내놓으며 사업 얘기를 하였는바 상대가 여자인 경우 거기 적힌 휴대폰으로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말하곤 했다.
마돈걸은 유세련을 2년 전 경마장에서 만났다. 잘 차려입은, 키가 훤칠한 미남이 마권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쌍승식이니 복승식이니 초보자가 보기엔 상당히 복잡한 그 도표 같은 건 한 번 익히면 그렇게 간단한 것도 없는데, 이 남자는 어머 완전 초짜이구나 싶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날 사인펜을 잡은 남자의 손은 그랜드피아노라도 치다 온 듯 유연하기 그지없었다. 유세련은 설명을 다 듣고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더니 ‘생큐, 맴’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영어를 사용하고 말았다는 계면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인상을 갖고 헤어진 남자가 그 레인이 끝난 후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서는 덕분에 돈을 땄다며 “어떻게 보답하죠?” 하는 것이었다. 말을 찍어준 적도 없는데 뭐가 덕분인가, 의아해 하는데 “저한테 9번 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해서 “그런 적 없는데요.”하니 “제가 환청을 들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들리는 소리가 있는 법이죠.”하고 또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게 노래로만 듣던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인가 하는 거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시작된 유세련과의 만남은 초기에 꽤 세게 불이 붙었다가 소강상태를 거쳐 현재는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알고도 만남을 끊지 못한 것은 마돈걸에게 만은 육체 외의 다른 금품을 요구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가 생각보다 유쾌하여 지루한 인생에 분명 활력소가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다른 여자들이 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걸 느끼는 것도 스릴이 있었다.
한편 백팔만은 어느 삼거리의 주막에서 내려 당나귀를 묶어두고 탁주를 한 잔 더 걸쳤다. 교교한 달빛 아래 자신의 그림자와 대작하는 외롭고도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경마는 짧고 인생은 길다’ 백팔만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거룩한 잠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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