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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90) - 지금 저 놀아요

서석훈
  • 입력 2014.02.0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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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지금 저 놀아요


오랫동안 쉬긴 했으나 여전히 스타 의식을 갖고 있는 여배우 장화자는 한 물 간 감독 김인식이 전화를 해오자 어쩐 일이냐고 떨떠름하게 받았다. 잘 나가는 감독이나 유명 제작사에서 전화를 해 왔으면 깜박 죽었을 여자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씁스레해진 감독은 그러나 준비해 둔 말이 있는 지라 장화자의 그런 떨떠름함 정도야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저요?" "어떻게 지내시냐고요.” 마치 추궁하는 듯한 감독의 말을 듣고 장화자는 긴장하였다. 이러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 세계 영화판에서는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건 캐스팅을 염두에 둔 발언이기도 했다. 그 말을 한 뒤에 캐스팅 된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까 그 말끝에 캐스팅 제의를 받지 않은 이는 얼마나 적은가. 아무리 한물 간 감독이라도 캐스팅 제의를 해오는 데야 반갑고 일견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역이 성에 안 차 설령 거절한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데야, 아직도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는 데야 반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노련한 장화자는, 화들짝 놀라며 언제라도 불러만 주시라는 투의 느낌이 안 나게 “저요? 그냥 지내죠 뭐.” 하고 노숙한 목소리를 냈다. “저요? 지금 저 놀아요. 감독님, 감독님은 뭐 하세요?” 이렇게 애타게 나올 주 알았지. 생각하며 말이다. “아 그래요? 댁이 아직 천호동 인가요?” “아니에요 이사했어요.” 어디로 이사했다는 답이 없었다. 감독은 아주 할 말만 딱 부러지게 하는 이 계집이 앙큼스러웠지만 그녀의 그 풍만하고 도발적인 모습을 떠올리며 꾹 참고는 “이사했어요? 어디로요?” 하고 매우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이야 이사를 가든 말든, 몇 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적 없는 어찌 보면 남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누가 이사를 가든 말든 그게 뭔 상관인가. 그러나 그렇게 놀라는 척 하는데 씹을 수는 없고 “수유리요.”하고 장화자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본론을 듣기 전에는 먼저 꼬리 칠 필요는 없었다. “아 수유리요. 아 마침 저 창동 갔다가 그 쪽 길로 가는 중인데 ... 가만... 차 한 잔 할까요?” 감독의 머리는 이런 순간 매우 비상하게 돌아갔다. 창동엔 원수 같은 그의 누이가 살고 있고, 본 지 일 년이 넘었고, 수유리는 지나가 본 적이 10년 전 무슨 상가에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쪽 길로 가는 중이라는, 그러한 말이 술술 나오는 데는 감독의 오랜 노우하우가 작용을 한 것이었다.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그 정도의 거짓말은 애교라고 봐야 할 것이었다. “지금요?” 화자는 즉각 반문하였다. 이 말은 정녕 지금 봐야 하겠냐는 뜻이고 감독은 정녕 봐야겠다고 나왔다. “네. 시간이 아직 뭐 열 시 전이네요.” 이들 세계에선 열 시는 초저녁이 아니라 그냥 오후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보잔다고 무작정 나가는 건 여자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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