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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 (윤한로 詩)

서석훈
  • 입력 2010.07.2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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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
윤 한 로

금요일
여의도 성모 병원에
정기 당뇨 검진을 받으러 갑니다
5층 옥상 정원
성모님 발치
고무 솥단지 화분 속에
코딱지만한 꽃들
수두룩빽빽하게 피었습니다
한송이 한송이 세어보니
고, 조그만 것들 모두 다
이파리 아홉개씩입니다
먼지 끼고
벌레 슬고
뜯긴 것들까지
딱딱,
아홉 개씩 달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솥단지 빠져나가지 않고
얇은 숨소리 내면서,
왜 아홉 개씩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무지하게
이쁘고
눈물 납디다
거위처럼 꽁무니 길게 빼고
묵주기도 한단을 바칩니다
고통에 눌리고 찢긴 이들을 위해서
지식과 지혜와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한갓 코푸는 휴지조각처럼 여기는
용기있는 이들을 위해서 바칩니다
나보다 백배 천배 더 아픈
성자 한사람
복도 끝에서 천천히 슬리퍼 끌며 걸어옵니다
오늘은 금요일 희생으로다
점심도 굶기로 작정합니다
시작 메모
여의도 성모병원에 정기 당뇨 검진을 받으러 조퇴한 날은 오래간만에 머리를 식힐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바람에 씻는다. 싱그럽다. 전철을 타고 올라가면서 사람과 차, 집, 간판들을 구경하듯 하나하나 살핀다. 머리 젖혀 오래오래 한 가지 생각에 매달릴 수도 있다. 그런데 병원에 가면 미안하기 그지없다. 몇 날, 몇 달, 몇 년을 잠시도 쉬지 않고 고통을 달고 사는 남녀노소 수많은 환자분들을 보면 죄스럽다. 고통에 눌리고 찢기고 지친 그분들 싸움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고통처럼 큰 봉헌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분들이야말로 거룩한 투사이고 성자이시다. 그분들 뼈마디 하나하나 새로 돋은 풀잎처럼 싱싱하게 일어서기를.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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