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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85) - 굶은 세월이 얼마냐

서석훈
  • 입력 2013.12.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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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굶은 세월이 얼마냐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미나의 말을 듣고 멀뚱히 있던 감독은 속으로 `할 말 있냐고?
할 말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선문답 같은 생각을 했다. 말이라기보다 오늘 우리가 베드신을 미리 연습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거고, 정 안 되면 또 딴 여자 불러내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복권 당첨된 돈이 있잖은가. 참 이 돈이라는 게, 복권 탄 돈이 있다는 게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는구나 싶은데 도대체 서두르거나 아쉬운 감정이 별로 들지 않는 거다. 돈 몇십만 원 정도 쓴 거야 그냥 버렸다 치면 되고, 꼭 버린 것도 아닌 것이 자신도 먹고 마셨으니 반은 자기 입으로 들어간 거고 또 여자의 향기를 맡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이것도 번 것이고, 한번씩 신체적 반응이 일어나니 이것도 번 것이고, 도대체 버릴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기껏 몇십만 원에 이 모든 걸 번 것이다. 이러니 돈 있는 자들은 도대체 머릿 속으로 이 돈을 쓸 궁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것이다. 스키장을 갈까, 호텔을 갈까, 크루즈를 탈까, 유럽을 갈까. 주식을 살까, 콘도를 살까, 수익상가를 살까 등의 생각들로 머리가 바삐 돌아가니 지루할 틈이 있겠는가. 한 때는 영화 투자자 구하느라 자신의 고귀한 예술작업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의 무지를 무신경을 질타하며, 소줏잔을 들이키며 고독한 예술가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스스로 위무하거나 했거늘, 그래도 어느 놈이 소주 한 잔만 사면 인생 다 얻은 듯 떠들어대고 그랬으나 이제는 그런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그저 무료한 얼굴로 여유 있게 시선도 느리게 말도 느리게 동작도 느리게 마음도 느리게 심지어 욕망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아까 음식점에서 뭐땜에 이 여자와 신체접촉을 시도했던가 의문을 가질 만큼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여배우 미나는 아무래도 이 자가 오늘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할 말이라면 굳이 할 말이라면 뭐 오랜만이라는 거다." 미나는 감독의 입에서 기껏 오랜만이다 라는 말이 나오자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미친 자식, 오랜만이라니. 그건 보자마자 하는 얘기지 좋은 밥 먹고 좋은 술 앞에 두고 어디 할 소리인가. 빨리 캐스팅 하겠다고 말을 해! 포르노인지 예술영화인지 말을 하란 말이다, 이 자식아! 이 허우대도 멀쩡하지 않은 왜소한 자식아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 출연한 지도 오래 돼지?”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어 미나는 좀 전의 화를 누르고 "그렇죠." 하고 대꾸했다. "나도 메가폰 잡아 본지 꽤 됐어. 그러니까 그게 3년 하고도 7개월인가."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3년 7개월이면 미나는 그게 다 굶은 세월이었다. 돈에 굶고 사랑에 굶고 정에 굶고 그짓 남녀관계도 거의 굶다시피 살아온 세월이었다. 청춘의 낭비였던 것이다.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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