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칼럼 - 오늘맑음] “누구 어깨에 기대 울까?”
[임순만 칼럼 - 오늘맑음] “누구 어깨에 기대 울까?”
  • 임순만 언론인·소설가
    임순만 언론인·소설가 hnanjn@naver.com
  • 승인 2019.11.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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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곡예사가 곡예를 마칠 때 반드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그를 잡아주는 캐처(catcher)다. 공중곡예를 펼치는 플라이어(flier)는 당목을 잡고 땅에서 떠올라 공중에서 곡예를 한 후 팔을 앞으로 쭉 뻗친 상태로 점프를 하여 허공에 몸을 던진다. 바로 그 때 날아오는 플라이어의 손을 잡아 안착시켜주는 사람이 무대 뒤의 캐처다. 그네를 놓는 순간 곡예사는 자신의 몸이 날아가며 만들어내는 관성 말고는 아무것도 지탱해주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 오직 캐처만을 의지해야 한다.

위험한 공간으로 날아오는 곡예사와 그를 사뿐히 잡아 안전하게 인도하는 캐처.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관계는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곡예사가 새처럼 자유롭게 공중을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그를 잡아주는 캐처가 있다는 믿음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돈 후 날아가다 캐처의 손을 잡는데 실패하여 떨어진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캐처가 제대로 손을 잡아주지 않은 것일까? 캐처가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있지나 않았을까?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돈 후 날아가다 캐처의 손을 잡는데 실패하여 떨어진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돈 후 날아가다 캐처의 손을 잡는데 실패하여 떨어진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의 주인공 야마시타 고헤이는 서커스단 생활 경력이 30년이 넘는 베테랑 곡예사다. 최고 난이도의 곡예를 펼치는 그를 잡아주는 캐처 우치다는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다. 어느 날 한 공연에서 연속해서 2번이나 공중에서 떨어진 고헤이는 분풀이를 하며 우치다의 뺨을 때린다. 얼마 후 시범을 보이다 또 떨어진 고헤이는 우치다의 비협조를 만천하게 공개하고, 캐처를 교체하기 위해 공중곡예 장면을 녹화한다. 녹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대통령으로서 기대고 울만한 사람이 있는가?” 미국의 조시 W 부시 대통령(재임기간 2001년 1월~2009년 1월)이 재임 중이던 2007년 언론인 존 드레이퍼가 대통령에게 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의 어깨에 기대어 나는 당신들이 생각한 것 보다 많이 울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내일도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과 드레이퍼의 대담집 ‘Dead Certain(절대적 확신)’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의 이유가 됐던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국내외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토로는 이어진다. “대통령직이라는 임무 자체만을 놓고 보면 자기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대통령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말에서 눈길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어깨에 기댄다’는 표현이다. 이 말은 성경에도 나온다. 제자 요한이 예수의 품에 기댄 채(leaning on Jesus's bosom, KJV) 말씀을 듣거나 음식을 먹는 모습이 요한복음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장면을 비롯해 여러 군데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요한의 거리낌 없는 소통능력과 영리함이다. 요한은 스승의 말을 잘 따랐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도 두려워서 떠난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형장까지 따라온 순진한 제자였다. 이런 요한에게 예수는 운명하기 직전 의탁할 데 없는 어머니를 부탁했다. 서양 중세미술에서는 요한이 주로 수염이 없는 미청년으로 그려져 있다. 요한의 이런 다정함과 격의 없는 소통의 모습은 인간관계에 있어 어디에서나 요구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순수하게 기대어 소통하지 못한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심중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제자 요한은 예수의 품에 기댄 채 말씀을 듣거나 음식을 먹는 모습이 요한복음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장면을 비롯해 여러 군데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요한의 거리낌 없는 소통능력과 영리함이다(사진= wikipedia.com).
제자 요한은 예수의 품에 기댄 채 말씀을 듣거나 음식을 먹는 모습이 요한복음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장면을 비롯해 여러 군데 기록돼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요한의 거리낌 없는 소통능력과 영리함이다(사진= wikipedia.com).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기진할 만큼 맥이 빠져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 어깨에 기대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며 눈물을 흘릴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그런 사람을 갖고 있는 것일까. 주변의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아주 슬퍼서 꼭 울어야 할 때가 있다면 누구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은가, 누구에게 기대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한 지인은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누라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다음이 딸일까. 예전엔 친구였을 텐데 나이 들며 변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어깨를 빌릴 사람도, 빌려줄 사람도 마땅치가 않다.”

다른 지인은 “가까운 곳에 사막이 있다면 사막에 나가서 실컷 울고 싶다. 사막이 없기에 바닷가에 가서 운 적이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지인은 “친구를 붙잡고 울었으나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을 후회했다”고 했다. “어려운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 사랑하는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운 적이 있었지만, 울고 싶을 때는 거의 혼자 운다”는 친구도 있었다. “옛 연인이 떠났을 때 새로운 연인 앞에서 운 적이 있다”는 사람이 있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기쁨에 복받쳐 속으로 울었던 적도 있다”고 한 사람도 있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소리치며 울었다”는 사람도 있고, “책상 앞에 앉아서 울었다”는 사람도 있다. “누구의 어깨를 빌리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기대어 울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세상은 결국 홀로 가는 것이고, 어려움은 혼자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기진할 만큼 맥이 빠져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때 어깨에 기대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며 눈물을 흘릴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그런 사람을 갖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소개한 지인은 부부의 금슬이 참 좋아보여서 부럽다. 한국의 남편들은 아내에게 약한 모습이나 눈물 보이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는데, 붙잡고 울고 싶은 대상으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 여간 신선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평생을 같이 갈 수밖에 없으니 사소한 것은 모두 인정해야 되고, 아내를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하려면 자신도 최대한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견을 말해 준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자신의 나약함을 온전히 드러내고 기대어 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친구와 울고 나서 후회했다는 경우는 참으로 아쉬운 경우라고 생각된다. 다 큰 사람이 실제로 우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은 누구나 울고 싶은 때가 있다. 산꼭대기에 가서 펑펑 우는 사람도 있고, 캄캄한 밤 깊은 시간에 홀로 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간절하게 울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며 자신의 내부를 토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는 것은 약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아니 위대하기까지 한 정책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믿고 싶어 하는 감정은 눈부실 만큼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강인한 사람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낼 만큼 강력하지 않기에 함께 갈 사람이 있어야 하고,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가. 자신을 내맡기고 다른 이 앞에서 울 수 있다는 사람은 얼마나 열린 사람인가. 그것은 절대로 후회할 일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는 것은 약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아니 위대하기까지 한 '정책'이다(사진= 빈센트 반 고흐, Old Man In Sorrow).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다는 것은 약한 인간으로서 훌륭한, 아니 위대하기까지 한 '정책'이다(사진= 빈센트 반 고흐, Old Man In Sorrow).

누군가에게 기대어 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 그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순수하거나 명민함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 누구에게라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기대어 울 사람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 울 사람이 없다면 자신의 소통능력을 점검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눈물이란 무엇인가. 사람 속의 약한 어떤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이 눈물이다. 눈물은 그 약한 마음 빈 구석의 틈을 비집고 솟아오른다. 절망이나 슬픔을 느낀다고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홀로 굳건하게 극복하는 것이 훨씬 이지적일 수 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큰 절망이나 슬픔이 마음속의 약한 부분을 헤집고 올라올 때,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홀로 짐을 지고 가는 것보다 동지적 소명감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짐의 무게도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치다의 뺨을 때린 고헤이는 녹화된 화면을 보고 곡예실패의 원인이 우치다의 미스캐치가 아니라 자신의 점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치다는 고헤이의 점프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베테랑 고헤이가 상처를 받을까봐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중곡예사가 캐처의 손을 놓쳤다면 십중팔구 곡예사에게 잘못이 있다. 캐처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나쁜 의도를 가질 여유가 없다. 캐처는 곡예사가 펼치는 곡예의 모든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뭐가 잘못 됐는지를 한 눈에 속속들이 파악한다. 그러면서도 손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직업이 주는 의무감이라는 것이 있다. 캐처는 잡아주는 사람이 아닌가. 잡아주는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라 곡예사의 자세가 잘못됐기 때문에 손을 놓치는 것이다.

누군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당신 앞에서, 아니면 당신이 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 눈물은 살아있는 양심이 가져다준 귀한 선물이다.(사진= 파블로 피카소, The Weeping Woman, www.pablopicasso.org 갈무리).
누군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당신 앞에서, 아니면 당신이 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 눈물은 살아있는 양심이 가져다준 귀한 선물이다.(사진= 파블로 피카소, The Weeping Woman, www.pablopicasso.org 갈무리).

세상 누구에게나 그런 캐처가 필요하다. 자기의 내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터져오를 때 힘든 모든 것을 맡기고 기대어 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영혼의 동반자를 가진 것이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심성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도덕성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 인간 심성의 총체적 부분이 깨어있다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당신 앞에서, 아니면 당신이 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때 눈물은 당신의, 혹은 그 사람의 눈동자를 적시며 흘러넘쳐 소리 없이 볼을 흘러내렸을 것이다. 그 순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눈물은 살아있는 양심이 가져다준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그 값진 선물은 두고두고 두 사람을 살아나게 할 것이다.

어떤 사람과 깊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그렇게 영혼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세상의 지복(至福)이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 울고 싶다. (*)

임순만 소설가·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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