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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로詩) 무협지

서석훈
  • 입력 2013.11.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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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윤 한 로

여드름 박박 난 그때
키도 작은 데다 없이 살아
친구 하나 없던 외롭던 그때
겨울비 구죽죽 내리고
정말 많은 책을 읽었네
와룡생 사마의 무유지 군협지 사자후
쿡 쳐박혀
무협지란 무협지 모조리 읽었네
다 내 것 같던 아리따운 낭자들
삼삼했지
무공을 폐지당한 초절정 세외고인은
아아, 모든 것 떨쳐버리곤
그 얼마나 초췌하던가
이불을 뒤집어쓰고선
이질에 걸려 요강단지에 올라타고도
맛있게 뜨겁게 읽었지
공부를 그렇게 했더면…
예비고사를 떨어지고
대학도 죄 떨어지고
그러나 결코 후회하지 않았네
사타구니 쓸며 쓸며
동생놈 뺨따귀 따리며 읽던 그 시절
흑흑,
내 인생에서 난 나를 가장 사랑했지


시작 메모
고1 때 밴드부, 야구부 애들이 책가방 가득 지니고(?) 다니던 무협지. 그 비밀을 알고부터 퀴퀴한 골방에 틀어박혀 왜간장 하나로만 밥 비벼 먹으며 줄창 읽어대던 무협지. 와룡생은 단지 ‘을씨년스러운’ 이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객잔과 밤과 정경을 묘파해 냈던가. 아직도 사춘기를 생각하면 가난과 외로움과 와룡생 무협지와 울컥 치미는 왜간장 맛. 무협지로 말미암아 외로움과 즐거움에 흑흑 터질 것 같던 시절이여.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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