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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77) - 잠깐만 그러고 있어요

서석훈
  • 입력 2013.11.03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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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잠깐만 그러고 있어요


“오미나씨 술이 많이 준 겁니까?” “네?” 감독의 말에 미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언제 내가 고주망태로 마시는 걸 봤단 말인가? 아무리 떠올려봐도 감독과는 스텝들과 배우들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주인공과는 한참 떨어진 구석 자리에서 몇 잔 얻어 마신 것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감독은 미나가 몇 잔을 마셨는지 심지어 마시기나 했는지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술이 줄었다니? “예전엔 술을 좀 하신 것 같았는데...” “조금 했어요. 지금도 조금 마셨는 걸요.” “아, 그래요? 몇 잔 했어요?” 하는데 사실 이건 감독의 말버릇이라기보다 계산된 음모였다.
‘음모’ 라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뭐 사소한 계략도 음모라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사소한 계략에 넘어가 자신을 그만 헌납하거나. 당하고도 당한 줄 모르고 지나고 보니 그만 당했더라 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감독은 또 어느 여자에겐 “말자 씨 술이 많이 늘었네요.” 하고 운을 떼는 바 상대는 "네? 저 전에도 이 정도는 마셨는데요." 하고 자기도 모르게 변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든 안 되든 질문을 던지고 보는 습성이 감독에게 있었다. "오늘 촬영 있습니까?" 묻고 상대가 "아니오" 그러면 ‘아 아까운데요, 오늘 완전 촬영 포즈에요.”하거나 "잠간 최근에 무슨 영화 봤어요?" 물어 "아니요" 그러면 ‘허 어쩜 그 배우와 똑같은 포즈가 나오죠. 난 깜짝놀랐네." 또는 "아 잠깐만 그러고 있어요." 하고 "네?" 그러면 "아 안되겠네요, 지나갔어요, 세계적인 배우들의 포즈가 딱 그랬거든요, 1954년 뉴욕 11번가에서 있었던 장면이죠." 하거나 또는 "전후 공습으로 무너진 파리 시가지에서의 연인들의 마지막 모습이 당신에게서 보이네요." 하는 것이다. 누가 제 정신 갖고 그런 미친 소리들을 하겠나. 그런 식으로 혼을 빼 놓은 다음 몇 번의 육욕을 채우는 데이트 끝에 여자는 다시는 그런 소리를 그 비슷한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된다. 여자가 뭐라고 해도 하품만 하거나, 여자가 음식값 계산하는 거나 멀뚱히 쳐다보거나 하고 혹시라도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여자가 재차 물으면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를뿐더러 이 여자 저 여자 헷갈려 엉뚱한 소리를 해대기 일쑤다. 오늘 미나에게 감독은 "왜 주량이 줄은 거로 보이나 했더니 술이 안 보이고 당신만 보여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미나는 남자들의 수작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수작 여부에 따라 적당히 대꾸도 해주고 때론 뒤집기 한 판도 하였으나 이 감독처럼 교묘히 엉뚱하게 마치 바보처럼 나오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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