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동영상 제작자는 일거리를 찾고 있는 여배우 민아 앞에서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이 작자가 이토록 여유를 갖고, 무슨 말을 해도 ‘그렇지’ ‘그렇군’ ‘그러게 말이야’ 같은 소리를 하며 가볍게 맞장구까지 치는 걸 보고 매우 의아했다. 저 여유만만과 저 염화시중의 미소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아등바등하지 않는 모습이며, 테이블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조금의 언짢음이나 적의 없이 너그럽게 바라보는 이러한 것들이 그가 알고 있던 그 영화감독 그 인간이 맞는가 하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오늘 이 인간이 나를 불러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 궁금했다. 보통은 영화감독이 여배우를 불러낼 땐 캐스팅 문제라든가 친밀감을 좀 더 쌓자든가 남녀로서 발전해 보지 않겠느냐는 노골적인 접근이든가, 아무튼 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동영상 제작자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무슨 말이라도 다 들어주겠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지 않는가. 그녀는 이 작자가 복권 1등 당첨된 돈 중 일부를 주머니에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 사내가 복권 된 사내일 줄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그녀 주위에 복권 된 남자를 사귀는 여자는 물론이고 혹은 아내건 남편이건 자식이건 부모건 친척이건 심지어 지인조차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 그런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저녁이나 하지 뭐.”
감독이 오랜만에 꺼낸 얘기는 일상적인 그러나 그 이야기 없이는 오늘의 만남이 더 이상 진전이 안 되는 그러한 이야기였다. 민아는 저녁 전에 만나 저녁을 먹지 말자는 인간은 본 적이 없으므로, 다만 뭘 먹느냐가 중요할 뿐 먹는다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하고 만나 본인이 돈을 낸 적은 사고뭉치 남동생과, 일방적으로 좋아하다 차인 그 작자 외에는 없으므로 식대에 대한 부담이나 책임감은 아예 실종된 편이었다. 여자들과 만날 땐 통 큰 언니가 없으면 서로 분담하고 했는데 대화는 아기자기하지만 스릴이나 가슴 뛰는 모험에 대한 기대는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무섭고 두려워지면 온갖 얘기를 다 주고 받을 수 있는 여자친구가 생각나고, 여자아이들과의 뒷담화가 지겨워지면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무슨 제의도 하는 남자가 그리워지곤 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이 감독은 갑자기 연락 온 경우로, 인생엔 이런 예외가 가끔은 필요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