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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88] Critique: 고양시 교향악단/콘체르토 시리즈 5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19.10.2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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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토요일 오후 5시, 고양 아람누리 음악당에서 열린 고양시 교향악단의 올해 마지막 콘서트

한 달 동안에 수도권 도시의 오케스트라가 두 번이나 다른 프로그램으로 콘서트를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이다. 같은 곡으로 횟수와 시기를 달리할 수 있지만 정규 스케줄에 작품도 그 단체가 이전에 자주 연주했던 레퍼토리도 아니요 한국에서 익숙한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도 아닌 대곡을 한 달, 정확히 말하면 3주 만에 무대에 올렸다. 10월 5일엔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와 <로마의 축제>를 이번 26일엔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과 <피아노협주곡> 그리고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이 고양시 교향악단에 의해 울려졌다. 이런 흔치 않은 이벤트는 그래서 연주하는 악단이나 관객이나 과부하이긴 하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 단체라 하더라도 3주 만에 새로운 레퍼토리를 완벽하게 익혀 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곡을 수백수천 번 맞추고 연습하고 시간차를 두면서 숙성시켜도 최고 경지까지 도달하기 어려울 터인데 레스피기를 마치고 3주 만에 새로운 곡에 도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더군다나 신곡은 섬세하고 우아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방불케 하는 연주자의 개인적 기량과 이국적인 색채를 요구하는 라벨이다. 아무리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회에 자주 찾는 관객이라 할지라도 한 달에 두 번이나 같은 단체의 연주를 보러 간다는 건 대단한 애정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인구 105만의 고양에서 이제 겨우 닻을 올린 고양시 교향악단에 그 정도 열성을 보일 팬덤이 형성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분명 공연 주기대로라면 12월에 프랑스를 주제로 고양시 교향악단이 연주해야 할 터인데 10월에 12월 걸 당겨와 몰아넣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을 마치고 커튼콜
생상스의 교향곡 3번 오르간을 마치고 커튼콜

피아니스트 원재연의 라벨은 치기 어렸다. 오케스트라의 금관은 날렵하지 못하고 둔탁했으며 순발력이 떨어졌고 현들은 무거웠다.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음악적 감동을 선사한다. 일주일 간격으로 2번이나 실연으로 들을 곡이지만만 '천국으로 가는 문'은 확고하다. 고양시민들은 복받은 거다. 지난해 새롭게 창단한 고양시 교향악단은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고양시민들에게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브람스의 2번 교향곡 등 낭만을 가득 담은 거장들의 명곡들을 차례로 선보이며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젊은 비루투오서 문태국, 신지아, 양인모 등을 총출동 시키면서 역동적인 교감을 이루어냈다. 이건 서울 아니 광역시도 아닌 인구 100만을 갓 넘긴 중소도시에서 음악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언제 또 아람누리에서 고양시라는 타이틀이 붙은 악단이 이런 음악적 도전과 성취를 이루며 시민들에게 고급문화의 진가를 전달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겠는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피아니스트 원재연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피아니스트 원재연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문>인 생상스의 장대한 감동에 빠진 필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전형적인 대중 콘서트의 일환인 앙코르로 <윌리엄 텔> 서곡의 마지막 행진곡 부분이 연주되자 객석은 흥에 겨웠다. 라벨이 끝나고 피아니스트 원재연은 앙코르를 2곡이나 했는데 첫 번째 선택한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를 언급하자 뒤에 아저씨가 오~~라는 감탄사를 자아냈고 필자는 '아니 앙코르로 10분에 가까운 그것도 피아노가 원곡이 아닌 죽음의 무도를?'이라는 생각이 든 것과 똑같다. 그것도 모자라 쇼팽의 <그랜드 왈츠>를 한 곡 더 연주하는 원재연의 화려한 기교와 환호하는 관객들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봤다. 윌리엄 텔 서곡은 고양의 반대편 신내동에서 일부러 오늘 공연을 들으러 온 중년 부인도, 인터미션 때 유투브로 원재연이 앙코르로 연주한 쇼팽을 검색해서 이어폰으로 듣던 앞자리의 신사도 다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집단의 흥분에 휩싸였다. 

극소수를 위한 음악적 고양(高揚)과 고상에 전념할 것인가 아님 이런 고양시 교향악단의 위대한 도전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연주되고 수도 없이 접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고민 없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윌리엄 텔이나 헝가리 무곡을 하는 단체로의 회귀냐는 딜레마에 빠진다. 송가인 같은 유명한 트로트 가수도 나오고 팝페라에, 국악, 그리고 성악가들이 나와 아리아 2-3곡을 부르는 열린 음악회, 팝스 콘서트 류의 음악회가 버젓이 '송년','시민을 위한', '추모', '기념', '문화제'라는 등의 수식어를 붙여 성행한다. 그렇게 버무리면 누구나 좋아하고 사람들이 모이며 환호한다. 그건 가장 쉬운 방법이다. 무슨 곡을 하든 누구를 임명하든 어떤 작품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하든 그저 관심 없고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잡음 없이 '행사'가 치우어졌으니 시 관계자도 좋고 의회도 좋고 찾아온 관객들도 연예인도 보고 아는 노래 들으면서 흥겨우니 좋고 연주자나 성악가들도 공부하고 연습할 필요 없이 맨날 하는 우러 먹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다 돈 줍는 격이다.

끝나고 로비에서 카를로 팔레스키와 원재연의 사인회에 고양시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사진제공: CNB뉴스 김진부 취재본부장
끝나고 로비에서 카를로 팔레스키와 원재연의 사인회에 고양시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사진제공: CNB뉴스 김진부 취재본부장

 왜 이 어려우면서 고독한 예술적 길을 가야만 하는가?

포퓰리즘과 정치, 경제적 역학관계에서 벗어나 독립해서 인간의 예술세계를 존중하고 인간이 만든 독창적이고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스며 있는 음악을 듣고 자유민주주의 시민으로 성장하고 살아가는데 양분이기 때문이다. 순수예술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당장의 이익을 중시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지지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하는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보완하는 가장 중요한 대안 중 하나인 사회적 관계 회복이 가장 필요한 분야이다. 당장 인기가 있어서 문화 소비자들에 의해 시장메커니즘이 지탱될 수 있는 대중예술과는 달리 단기적 대중성이 낮고 성과나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순수예술은 그 자체의 사회적 중요성과 명분에 대한 자발적이고 순수한 공감과 존경이라는 선의에 기반한 도움과 기여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런 토대에서 시민들에게 양질의 공연을 제공하고 문화향유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원 목적이 달성된다. 가치창출 면에선의 예술은 촌각을 다투는 경쟁과 속도전이 아니다. 2년? 사람에게 비교해도 걸음마를 떼기도 힘든 짧은 시간이다. 이탈리아의 한 도시 오케스트라 악단은 근속 연도가 40년이 넘은 사람이 넘친다고 한다. 베르디만 40년 넘게 연주했다고 하니 어떤 경지일지 눈에 훤한다. 그리고 나태와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한 우물만 판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력도 대단할 터.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시민회관에 가서 들은 어린이가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자녀와 함께 문화예술회관을 다시 찾고 그 도시의 악단 단원과 길거리에 우연히 만나도 알아보고 서로 인사를 건네는 도시, 그게 바로 진정한 문화가 숨 쉬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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