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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물맞이

김홍성 시인
  • 입력 2019.10.23 08:34
  • 수정 2020.12.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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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은 소나기나 무지개와 함께 내 어린 시절 여름철 추억의 배경이기도 하다. 어느 해 여름 방학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버지를 따라나선 오전부터 커다란 뭉게구름이 서성이더니 돌아오는 오후에는 뭉게구름이 몰려오면서 차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김홍성 

 

아버지의 여름은 물맞이 철이었다. 운악산 서파 골짜기에는 물맞이 하기 딱 좋은 폭포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아이들도 폭포 밑에 데려가 물맞이를 시켰다. 폭포 밑에서 물맞이를 하다가 너무 추우면 뙤약볕에 뜨겁게 달궈진 넙적 바위 위에 엎드려 찜질로 몸을 뎁힌 후 다시 폭포 밑에 가서 섰다. 찜과 물맞이를 반복하다가 무료해지면 가재를 잡고 머루 다래를 따 먹었다

 

배가 고파지면 어머니가 준비해 온 주먹밥과 오이지를 간식으로 먹었다. 특별한 날, 이를테면 서울 외삼촌들(당시 고등학교에 다녔다)이 놀러 온 날에는 솥단지를 들고 가서 닭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닭을 앉힌 솥을 걸고 삭정이를 주워 불을 때서 닭이 푹 삶아지면 건져서 살코기 먼저 뜯어먹고 뼈다귀들은 알뜰히 모아서 닭국물이 끓고 있는 솥에 다시 쏟아 넣었다. 그리고 깨끗하게 씻은 흰쌀을 넣고 죽을 쑤었다.

 

어머니가 양은 사발에 닭 뼈와 함께 퍼 담아주는 뜨끈뜨끈한 닭죽은 노란 닭기름이 반지르르 했다. 식구들은 우선 닭 뼈에 붙어 있는 죽을 핥고, 아직 붙어 있는 힘줄 같은 것을 뜯어 먹은 후 뼈까지 씹었다. 솥에서 오랫동안 삶아진 뼈들은 어린 이빨로 씹기에 무리가 없었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나왔다.

그렇게 뼈다귀들을 씹는 동안 적당히 식은 죽 위에 고추장을 한 수저 얹어서 조금씩 비벼 먹으면 특별한 맛이 났다. 죽을 비운 솥은 깨끗이 헹군 후에 다시 감자나 옥수수를 쪘다. 외삼촌들은 솥 밑에 남은 알불 위에다 가재를 굽기도 했다. 살아 있을 때는 누런색이던 가재 껍질은 알불 위에서 빨갛게 변했다.

 

아버지의 옛날 사진첩을 보면 서파 골짜기에서 찍은 사진이 꽤 많다. 바위에 엎드려 있는 나를 비롯한 식구들 사진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군의관 시절의 동료들이나 간호장교들과 찍은 사진들도 꽤 많다. 짧은 하이칼라 머리를 한 하얀 러닝 바람의 아버지의 얼굴은 햇볕에 타서 유난히 건강하게 보였다. 그리고 간호장교들은 한결 같은 파마머리를 했다.

 

서파 골짜기에서 아버지가 찍은 어머니의 사진 중에는 어머니가 금방 물에서 나와 풀어헤친 머리를 말리느라 두 다리를 가지런히 펴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사진이 있다. 아버지가 찍은 어머니의 사진 중에 어머니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는 사진은 오직 그것 한 장 뿐일 것이다. 다른 사진은 간호 장교들처럼 대개 파마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진의 배경에는 커다란 뭉게구름이 엉켜 있기도 하다.

 

뭉게구름은 소나기나 무지개와 함께 내 어린 시절 여름철 추억의 배경이기도 하다. 어느 해 여름 방학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버지를 따라나선 오전부터 커다란 뭉게구름이 서성이더니 돌아오는 오후에는 뭉게구름이 몰려오면서 차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아버지도 나도 러닝 차림이었는데, 햇볕에 익어 뜨거웠던 아버지의 잔등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나고 있었다. (내 잔등에서도 그런 김이 나고 있었을까?). 

 

젊은 시절 아버지의 잔등은 얼마나 굳건했는가. 또한 두 다리는 얼마나 튼튼했는가.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산정호수의 수문 위에서 다이빙을 한 후 물을 힘차게 차면서 제방으로 돌아와 그 커다란 체구를 일으켰다. 그 때의 아버지 모습은 영화 <길>에 나오는 잠파노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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