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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82] Critique: 2019 서울시향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19.10.2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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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토요일 오후 5시, 롯데콘서트홀의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

프리뷰에서 적은 대로 피에르 불레즈의 노타시옹을 관현악 버전으로 한국에서 들을 주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20년이 넘은 독일 칼스루에 음악대학 음악이론/작곡과 재학 시절, 12음기법과 음렬주의에 대한 학습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해야 했던 과제곡이었다. 2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 주류 음악은 필자에겐 감상의 대상이 아닌 극복의 대상이었다. 호불호와 공감의 유무를 떠나 공부해야 했다. 주류 음악계의 평가에 편승해야 했다. 어떻게든 시키는 대로 그들이 정해 놓은 아카데미즘을 따라야 했고 그러면서 어린 나이에 남들과 다르게 본 고장에서 제대로 서양의 음악 전통과 기법을 확실하게 배운다는(배웠다는) 자부심도 나름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근 20년 만에 한국에서 들은 서울시향의 노타시옹은 지난 시절만큼의 감흥이 없었다.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편성은 경이롭다기 보다 유럽 주류 음악계에 도리어 반발심만 생겼다. 그리고 이어진 다섯 개의 악장은 내용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전혀 공감이 없는 말 그대로 교과서에서나 있을법한 박제품이었다. 새롭고 신선하며 파격적이기다기 보다 피에르 불레즈라는 기득권 중의 기득원이니 가능한 자아도취요, 고립이요, 나르시시즘의 극치였다. 물론 교과서 과제로 노타시옹을 공부한 필자는 음렬작곡기법 완성도와 음렬의 극한 가능성의 추구, 음향으로서의 효과 등 역사적 측면에서의 곡의 의미와 완성도를 통달한 상태지만 <공정성>이라는 측면에선 저항감이 생겨났다. 이걸 그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의 문화 사대주의자들이 이 땅의 풍토와 기호, 문화에 전혀 맞지 않은 몇몇의 지식인들만의 우월한 소유물로 세워 버린 것이다. 현재 이 정도의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의 작곡가는 한국에도 많다. 하지만 서울시향이 그걸 연주할까? 이 정도의 대편성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통용할까 하는 삐딱한 마음만 생겼다.

2019 서울시향의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 지휘자 티에리 피셔의 커튼콜
2019 서울시향의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 지휘자 티에리 피셔의 커튼콜

생상스가 시작되니 얼마나 불레즈의 음악이 관념과 언어가 중심이 되는 허영인지 더욱 절감했다. 생상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이집트'란 부재가 붙을 정도로 이국적이었다. 여유 있으면서 프랑스적인 에스프리가 충만한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작품이었는데 이런 보편성과 세계성을 띤 작품 창작 배경에는 역시 주류 음악계의 거목으로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문물을 체험하고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면서 그것들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풍부했을 생상스라는 사람의 음악적, 사회적 위치와 영향력에 기인할 것이다. 허나 생상스의 음악은 반항심이 생기는 게 아닌 톨레랑스(Tolerance), 즉 관용으로 사람들을 품고 통하게 만든다. 장이브 티보데의 연주는 생상스의 연주에 최적화된 감미롭고 포근했다. 오케스트라와 일체 된 음색과 곡에 대한 깊은 이해와 소화력은 문화적 자부심에 기반한 포용이었다. 19세기의 곡을 20세기 전반의 재즈를 연주하듯, 그래서 거쉰의 피아노협주곡 3악장을 연상하는 듯한 시공을 뛰어 넘은 진정한 인간애의 반영이요 다채로운 사운드 그리고 프랑스 피아니즘의 절정이었다. 그의 연주에 방점을 찍은 건 앙코르였다. 그가 선택한 곡이 뭔지 아나? 생상스의 뒤를 이은 프랑스의 자랑, 라벨의 <죽은 황녀를 위한 파반느>다. 생상스든 불레즈든 프랑스 음악진흥에 힘쓴 인물들이다. 정명훈이 90년대 초에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단 상임지휘자로 취임되고 제일 먼저 녹음한 음반이 프랑스 대작곡가이자 불레즈의 스승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이었다. 프랑스에 문화적인 수용이자 인정이요 검증이었다. 이제는 외국의 음악인들이 우리 문화에 검증을 받아야 한다. 우리 교향악단이 외국에 나가 자신만만하게 생소하지만 불레즈의 노타사옹처럼 우리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고 같이 나가서 협연한 한국의 피아니스트가 무명의 한국 작곡가의 피아노 작품을 앙코르로 연주할까?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성이 불레즈의 노타시옹보다 우리 창작품이 떨어져서 연주를 안 하는 것인지 아님 불관용인가.... 아님 사대주의에 찌든 불공정한 먹물들 만의 잔치에 어울리지 않아서인가....

감미로움과 프랑스 에스프리의 절정, 피아니스트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
감미로움과 프랑스 에스프리의 절정, 피아니스트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5번

포용이라는 관점에서 생상스의 교향곡 3번은 이 모든 걸 아우는 곡이다. 불레즈에 의해 야기된 개인적인 저항심이 순화되고 진정되었다. 화합하게 만들고 다독였다. 1악장의 현의 악센트는 강렬하고 빨랐으며 유기적으로 들어맞았 고 1악장의 2부에선 유려했고 온화했다. 오르간의 저음과 함께 현의 유니즌은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했다. 상처받은 삐딱심이 더욱더 수그러들고 치유되었다. 나의 영혼이 저 위에 홀로 독야청정하고 있는 오르간의 곁으로 상승해서 옮겨지며 더욱 승천하고픈 그래서 속세의 이런 불공정을 뛰어넘어 파라다이스로 향하는 듯했다. 2악장에서 현은 다시 격렬하면서 시퀀스를 순차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화합의 장으로 치달았다. 오르간의 위대한 C장3화음(어찌하며 현대음악은 불협화음의 해방이라는 명제화에 이 위대한 유산들을 포기했는가) 뒤에 이어지는 역시나 대곡의 마지막엔 수천 번을 사용해도 결코 시들지 않는 클리셰(cliché)지만 항상 효과는 만점인 '닥치고 푸가'로 대망의 피날레가 길게 울리고 절로 튀어 올라 기립박수를 하게 만든다.

Spectacular! 그래! 오늘도 서울시향이 맞았다. 음악회의 부제답게 이 단어가 감탄과 함께 튀어나왔다. 서울시향은 이 말이 입에서 떨어져 나올 거라고 예상이나 한 것인가! 그래. 오늘도 그들이 맞았다.... 음의 장관이요 화합의 장이며 과거와 현재를 품은 진정한 똘레상스의 관용의 대장관이었다.

Spectacular! 그래! 오늘도 서울시향이 맞았다!
Spectacular! 그래! 오늘도 서울시향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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