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신사(151) - 우편배달부냐? 벨을 두 번 누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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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51) - 우편배달부냐? 벨을 두 번 누르게
  • 서석훈
    서석훈 webmaster@horsebiz.co.kr
  • 승인 2013.04.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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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우편배달부냐? 벨을 두 번 누르게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자신의 승용차를 대리기사가 몰게 하고 뒷좌석에 모델 고대해와 나란히 앉아, 허벅지를 붙였다 뗐다 하며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쓰잘데없는 얘기를 하고 있을 때, 고대해는 하품을 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남자가 1999년 12월 비오는 날 홀로 다리를 건넜다고 주장하며 그 사연을 밝히고 싶어 하기에 예의상 뭣 땜에 다리를 건너고 그러셨냐고 한 번 물어보았다. 평소의 대화법 같으면, 뭔 바람이 불어 다리를 오가고 지랄하셨냐고 했겠지만 초면에 겨우 술 한 잔 한 사이에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겠기에 점잖게 여쭤 본 것이다.
남자는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해오던 대로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다 지난 얘기라 또 꺼낸다는 게 내키지는 않습니다만 ” 하고 운을 떼었다. 내키지 않으면 얘기하지 마시라는 게 평소 고대해의 어법이지만 이 또한 예의를 지키느라 가만히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기어코 하겠다는 의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뭐 이제 와서 새삼스레 회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나이도 아니고 그런 정서도 메말라가고 있고 그렇지만 마침 오늘 그 장소를 건너다보니 일부러 생각 안하는 것도 그렇고...” 남자는 계속 이렇고 저렇고 그렇고 같은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대책 없는 인간이지만 바로 면박을 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또 고대해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고대해는 오늘 어지간히 예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예의를 지키려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날 오전이었습니다. 저는 제 여자친구 집에 갔습니다. 아침 일찍 간 것은 제가 며칠 전 그녀의 방에 서류를 하나 놓고 온 게 있는데 그게 갑자기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가 지금처럼 활발하게 이용되던 시절이 아니었고 문서를 메일로 잘 주고받지도 않았습니다. 중요문서를 오늘날처럼 전자문서로 보관 해놓고 있지 않았어요.”
남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여자친구 집에 간 얘기를 서두부터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한 번 허벅지가 밀착해 들어왔다. 과거의 여자친구 몸뚱이가 생각났는지 다리를 가만 두지 못하고 까불고 있었다. 고대해는 다리가 아니라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으나 무안할까봐 약간 떨어져 않는 것으로 갈음하였다. 남자는 그래도 경우는 있어 더 이상 밀착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게 아마 오전 10시 40분경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당시 오피스텔 13층에 살고 있었는데 전 우리의 약속된 신호대로 벨을 두 번 길 게 한 번 짧게 눌렀습니다.” ‘우편배달부냐? 벨을 두 번 누르게’ 그러나 고대해는 잠자코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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