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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66] Critique: 2019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의 베토벤 교향곡 "영웅"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19.09.28 09:28
  • 수정 2019.09.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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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 금요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독일에서나 들을 수 있는 수준의 호사를 서울에서 누린 구원으로 얻은 평화

[나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전언]을 통해 바그너는 그 직전에 탈고한 [오페라와 극]에서 오페라라는 장르에 대해 자신이 제기한 생각들과 여태까지 쓴 작품들 사이에 발견될 수 있는 모순을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이러한 글들은 일반 대중이나 평론가들이 아닌, 적어도 작곡가를 “이해하려는 바람이나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향한 것이며 바그너는 이들을 “친구들”이라 칭했다. 바그너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과 더불어 “삶”이 함께 이해되어야만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고 그 예술을 제대로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가 예술적 표현의 필수조건이라고 여기는 “형상”(Gestalt) 또는 예술가의 뚜렷한 형상화 능력이 반복해서 제시되는 작곡 방식을 착안하게 된 배경과 연유를 위의 전언에서 밝힌 것 처럼 명곡과 명 연주도 '이해하려는 바람이나 욕구를 가진' 또는 '그에 상응하는 안목과 심미안'이 있는 '친구들'만이 명곡를 명곡답게 해주는 명연주를 누릴 수 있을 것인데 그런 숨통을 튀어준 연주가 9월 27일 금요일 예술의 전당에서의 서울시향의 바그너와 베토벤 연주였다.

영웅교향곡을 마치고 커텐콜
영웅교향곡을 마치고 커텐콜

<파르지팔>은 흔히 “구원”(Die Erloesung)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바그너 최후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바그너는 장례식을 보여주지만 주인공이 죽는 것은 아니다. 성배의 왕 암포르타스의 늙은 아버지 티투렐의 장례식이다. 암포르타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찌른 창에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육욕의 시련을 극복하고 예언대로 동정심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은 잃어버린 창을 되찾아 성배의 성으로 가져오고 스스로 세례를 받은 후 쿤드리에게도 세례를 베푼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해 암포르타스를 고통에서 구하고 모두를 구원하는 고된 임무를 떠맡은 것이다.

매년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사무엘 윤을 바이로이트나 쾰른이 아닌 서울에서 만난게 구원이다. 이태리 가곡이나 아리아로 점철이 된 국내 성악계에 이런 바그너 가수가 바그너를 제대로 들려준 것은 우리 클래식 음악계 레퍼토리 확산에 큰 기여이자 서울시향 같은 단체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안정적인 톤과 독일인을 연상케하는 발음으로 진중하면서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암포르타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마침내 성괘를 열면서(Offnet den Schrein) 바그너의 음악은 우리들에게 치유가 된다. 그래서 흥과 섯부른 '안다박수'와 맹목적인 환송성이 아닌 치유의 분위기로 좌중을 숙연케 만들며 뭉클한 종교적인 제의(Ritual)의 집단 나르시즘을 경험한다. 바그너는 예술이 종교와 같은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오직 예술을 경험할 때만이 고통으로 가득 찬 의지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예술은 의지의 세계, 즉 속세로부터 우리를 구원시켜 준다.

암포르타스 역으로 분한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 숙연한 종교적 제의의 엄숙한 구원을 진중하게 노래했다.
암포르타스 역으로 분한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 숙연한 종교적 제의의 엄숙한 구원을 진중하게 노래했다.

마르쿠스 슈텐츠는 베토벤의 <영웅>을 중간중간 너무 빠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몰아갔다. 그런 생동감을 서울 시향이 부담 갖지 않고 따라오고 맞춰주면서 도리어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었다. 구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베토벤 작곡기법의 통달에서 오는 지휘자의 조정능력은 복합적이며 대위법적 전개와 발전부에서의 제3주제의 삽입 등으로 1번부터 5번까지의 베토벤 교향곡 중 3번 1악장이 단연코 제일 긴 악장임에서 도리어 빛났다. 2악장 '장송행진곡'의 스토리텔링과 장면화는 교향곡의 2악장이라기 보다 독립된 하나의 악곡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마르쿠스 슈텐츠에 의해 금세기 수도 없이 많은 영웅들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게 만드는 슬라이드쇼였다. 3악장의 긴장감은 1부의 바그너의 공간감과 일맥상통하면서 시간이 공간이 되는 체험을 하게 만들며 4악장으로의 집결된 에너지와 긴장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연결, 맹렬하게 도입부로 간 후 얼마간의 휴지는 마르쿠스 슈텐츠 특유의 완급조절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서 지나치지 않다. 적당하며 진중하다. 어느 하나의 치우치지 않은 중용의 미를 보여준 연주다. 파르지팔을 통해 암포르타스는 구원을 얻었지만 베토벤의 영웅은 아직 진행형이다. 더군다나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구원해줄 진정한 영웅을 기다리며 베토벤의 영웅은 완결형이 아니기 때문에 베토벤 음악의 궁극의 에너지는 오늘도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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