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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괸돌 충열이네 집

김홍성 시인
  • 입력 2019.09.19 11:55
  • 수정 2020.12.2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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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보니 메주 냄새 나는 컴컴한 방이었다. 옆에 아무도 없고 밖은 조용했다. 창호지 구멍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이 방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아주 낯선 방은 아니었다그 방은 괸돌 마을 충열이네 집 건넌방이었다.

 

어둠을 꿰뚫은 한줄기 빛살 속에는 수많은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살을 만져보고, 빛살이 들어오는 창호지 구멍을 손으로 가리기도 해보다가 마침내 창호지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환한 봄날의 풍경이 거기 있었다. 빈 외양간 너머로 동산이 보이고, 동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어있었다. 

 

어떤 진달래들은 능선을 타고 충열이네 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오면서 말하고 웃었다. 그것은 진달래가 아니라 진달래를 한 아름 씩 꺾어든 어머니와 이모와 고모였다. 1950 년대 후반의 어느 봄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괸돌 마을 충열이네 집 건넌방에 재워놓고 고모 이모와 함께 앞동산에 올랐던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온 한북정맥이 주렁주렁 새끼 쳐 낸 야산들이 빙 둘러 웅크리고 있는 충열이네 마을 널따란 밭 가운데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는 석기 시대의 고인돌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고인돌의 준말인 괸돌이 되었다는데, 충열이네 집은 국도변 야산에 기대어 자리 잡은 농가였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린 초가집이었으며, 쇠죽 쑤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허술한 부엌과 외양간이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마루가 있었으며, 건넌방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간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집 앞에 그리 넓지 않은 밭이 있었고, 밭 사이에 실개천이 흘렀으며, 실개천 옆으로 난 농로는 국도로 이어졌다.

 

어머니에 의하면, 우리가 충열이네 집 건넌방에 세들어 살았던 1954년에 아버지는 괸돌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전병원의 군의관이었고,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울 때였다. 충열이네 집에서 보낸 어머니 신혼생활은 1년도 채 안 된다. 우리는 아버지가 야간 진료소를 차린 십리 밖 면소재지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이사한 뒤에도 어머니는 한 살 한 살 더 먹는 나를 데리고 충열이네 집에 마실을 다녔다. 내가 더 자라서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하교길에 혼자 괸돌에 가서 놀기도 했다. 밭에서 일하는 충열이 형네 참을 얻어먹은 적도 있고, 충열이 형 어머니가 뒤꼍에서 따다준 새빨간 앵두를 먹으며 앵두 씨를 멀리 뱉는 장난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 밀밭의 밀을 훑어 껌처럼 씹기도 했다.

 

충열이 형네 집 울안 꽃밭의 꽈리도 기억난다.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 때도 어머니를 따라 마실을 갔나 보았다. 어머니는 부적 쓰는 주사(朱砂)처럼 붉은 꽈리 껍질을 곱게 찢어 돌돌 말아서 꼭지를 땄다. 어머니는 꼭지를 딴 자리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 머리핀을 넣어 찐득한 즙으로 뭉쳐있는 씨들을 조심조심 파낸 후 꽈리를 불었다

내 귓가에는 아직 어머니 부는 꽈리 소리가 맴돌고, 내 혀 밑에는 비릿한 꽈리 속 맛이 남아있다. 어머니에게 업혀서 어머니 등에 뺨을 대고 어머니 부는 꽈리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기억도 난다.

괸돌 마을에 살 때는 동생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으므로 어머니는 나를 노상 업어서 재웠다고 한다. 잠들었다 싶어 이부자리에 누이면 금방 깨서 우는 통에 어머니는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업은 채 서서, 뒤주에 기대어 자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괸돌 마을에 가 본 때는 징집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충열이 형 혼인 잔치를 보러 갔던 것이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차일막 밑에서 하는 구식 결혼이었다. 국수와 인절미와 홍어 무침이 맛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충열이 형 얼굴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괸돌 '충열이'네 집 툇마루. 이 어린이의 이름은 김홍성(필자).
괸돌 '충열이'네 집 툇마루. 이 어린이의 이름은 김홍성(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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