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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김종삼 시인의 드빗시 山莊 21

박시우 시인
  • 입력 2019.09.16 17:42
  • 수정 2019.09.2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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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오보에협주곡

한 老人이 졸고 있었다
몇 그루의 나무와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BACH의 오보의 主題가 번지어져 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
갑자기 해가 지고 있었다

-김종삼 ‘留聲器’ 전문

▲오보에의 명수 하인츠 홀리거가 연주하는 바흐의 오보에협주곡. ⓒ박시우
▲오보에의 명수 하인츠 홀리거가 연주하는 바흐의 오보에협주곡. ⓒ박시우

김종삼 시인이 1974년 3월 『현대시학』에 발표한 ‘유성기’입니다. 김종삼은 일본 유학 시절과 해방 후에는 한동안 유성기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축음기라고도 하는 유성기는 음색이 따뜻하고 고풍스럽지만 잡음도 많이 끓었습니다. 지글거리는 유성기 소리는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천식을 앓는 노인의 잔기침 같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종삼은 낡은 유성기와 노인을 하나의 존재로 묶어두고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다는 오보에는 음색이 맑고 감미로운 목관악기이지만, 종삼의 시에는 쓸쓸한 소리로 다가옵니다. 유성기를 통해 들리는 오보에 소리는 색바랜 그리움이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졸고 있는 한 노인의 생애는 유성기를 닮았고, 나무와 마른 풀잎에 스치는 바람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오보에 소리처럼 들렸을 겁니다. 노인에게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 빛났던 시절이 있었겠죠.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이 연주에 앞서 조율할 때 오보에의 ‘라’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말이죠. 사방으로 번져가는 바흐의 오보에 음악은 삶의 자비를 떠올리게 할 만큼 투명하고 아름다운데, 재생 시간이 짧은 SP판만큼이나 해는 갑자기 지게 됩니다.

SP판 녹음은 아니지만,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와 아이오나 브라운이 지휘하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가 연주하는 바흐의 오보에협주곡이 눈부신 초가을 하늘에 번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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