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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토카타와 푸가 BWV.565

박인 작가
  • 입력 2019.08.16 10:54
  • 수정 2019.09.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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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본 아내라는 여자의 눈에는 비극이 담겨 있었다.
이혼 행렬에 합류한 대열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었다.
산다는 일이 단꿈이고 깨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누가 먼저 접시를 깬 것일까. 접시와 그릇이 깨지며 튀어 오른 음식이 벽면과 식탁 위에서 추상화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파멸을 예고하는 몇몇 사건이 지나갔다. 어느 순간 아내는 나의 손을 밀어내고 포옹을 피했다. 나 역시 아내와 몇 마디 마지못해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서로 잠자리를 멀리했다. 그녀와 내가 주인공인 초현실적 연극 한 편이 막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누가 먼저 갈라서자고 할 것인가. 결혼이라는 비극적 아포칼립스가 막을 내리고 각자 제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사랑은 서로에게 용인된 것이었고 이별은 서로에게 용서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각자 다듬고 길들이지 못했다. 날을 세워 상처를 주었을 뿐이다.

▲『Free soul Ⅱ』 890×1300㎜, Acrylic 박인作
▲『Free soul Ⅱ』 890×1300㎜, Acrylic 박인作

권투로 치면 좋은 스파링상대였던 셈이다. 가볍게 혹은 빠르게 시작해서 무겁게 혹은 느리게 끝이 나는 싸움. 스트레이트 훅훅 하다가 스트레이트 어퍼컷을 날리는 싸움. 연습이라고 절대 봐주는 거 없는 싸움. 실전이었다. 가끔 싸움이 싫어 피할 때도 있었다. 궤도를 이탈하여 링 밖에 서면 막무가내로 손가락질하거나 비웃는 버릇만 생겼다.

“내가 지금 당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해요? 난 지금 불평을 늘어놓는 거라고요. 비난은 인간을 공격할 수 있지만, 불평은 당신 버릇을 고치려는 거야. 당신은 나갈 때 한 번도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았어. 주말에는 아이를 돌보지도 않았지. 머리가 나쁘고 게으르고 피곤해서가 아니라 원래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지.”
“제발 여왕처럼 굴지 마. 내가 쇤네 정신으로. 예, 왕비마마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너는 자유롭게 살고 난 그림자처럼 무시당하는 느낌이야. 월급보다 카드청구서가 많은데 이 핑계 저 핑계 사탕발림하다가 결국 입을 닫고 아무 말도 안 하잖아.”
“뭔가 잘못되어 가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거야. 이런 기분을 알아? 나도 여기저기 치이고 힘들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이 나를 날카롭게 만들어. 한마디로 사는 게 스트레스고 지옥이지.”
“그럼 지옥에서 스트레스받기 때문에 바람을 피운 거니?”

10년 전, 내가 처음 본 아내라는 여자의 눈에는 비극이 담겨 있었다. 사랑에 치이고 음독을 한 후 병원에서 퇴원한 후였다. 한 여자를 이렇게 만든 놈을 찾아가 칼침을 놓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로? 성배를 바라보듯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수에 어린 하늘을 보듯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그녀를 돌봐주었다. 그 시절 나는 여성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지금 사랑하는 이여, 어느 시인의 말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심정만 남았다. 좋은 사이가 있다면 나쁜 사이도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은.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그날 나는 단지 겁을 주려고 이혼서류를 들고 와서 작성하였다. 아내는 이틀 전에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 전화번호 목록을 보고 최근에 결별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혼 행렬에 합류한 대열에는 법칙이 한 가지 있었다. 먼저 여자 얼굴을 보고 혼인한 자들은 다들 헤어졌다. 얼굴만 바라보고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 마음만을 보고 혼인한 사내들은 얼굴에 반해서 한 이들보다 더 먼저 헤어졌다. 여자가 변하자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고.

이혼서류를 작성하고 아내가 쓸 내용만 남겨 두었다. 아내의 전번을 누르려다 말고 대신 소주를 한 컵 따라 들고 소파에 앉았다. 평소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도 귀찮았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그날 하루치 난장판이 줄을 서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확실하게 밝히지 못하는 지옥의 묵시록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절대 권위적인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놈의 권위에 침을 뱉을지언정. 소주 한 컵을 들이키면서 뭐라 뭐라 헛소릴 하다가 나는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파 분명 밥을 하고 있었는데 다섯 시간 동안 나는 의식불명이 되었다. 잠깐 앉아 쉰다는 것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든 것이다. 머리는 깨어있어도 몸은 잠을 원하고 있었다. 모래알 같은 밥을 입안으로 넣고 꾸역꾸역 씹었다. 아내가 끓여주던 북엇국이 그리웠다. 가슴 한편에서는, 나도 당신이 만든 북어 국물처럼 시원하고 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국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서야 쓰겠어, 라는 말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산다는 일이 단꿈이고 깨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속에서 나는 한 여자를 보았다. 왕국을 물려받은 여왕이었다. 그 여자 눈에서 싸늘한 레이저가 발사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겨울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과 실물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나는 따뜻하게 살고 있는 가족을 보고 싶었다. 그 여왕이 아내로 바뀌었고 나는 그녀의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애원하고 싶었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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