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광복절, 백범김구를 만나다.

권용 전문기자
  • 입력 2019.08.15 12:36
  • 수정 2019.09.27 17:4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백범 김구, '백범김구기념관'에 다녀오다.

 벌써 7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와 비교하면 많은 것이 변했다. 많은 희생으로 이룩한 나라 대한민국. 과연 김구 선생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나의 소원'은 지금 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서울로 향한다. 이 땅의 후손들을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린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019년 3월부터 8월까지, 여러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시간들은 감사로 가득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그 중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를 이끌고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생의 70주기, 8월 광복절을 맞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이 되셨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리라.

효창공원과 백범김구기념관을 함께 돌아보기를 추천한다. ⓒ권용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옆에 자리한 '백범김구기념관'이다. 이렇게 크게 전시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경찰학교 학생들이 방문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민들의 안전과 도심의 치안을 위해 일하고, 또한 나라를 지키고 민족을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지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대한민국의 미래 인재들이 선생의 기념관을 돌아보며 민족의식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아직 풋풋함을 감추지 못한 동생 같은 모습이지만, 머지않아 당당한 경찰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나갈 청춘들을 보니 든든한 마음이 앞선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백범김구기념관. ⓒ권용

기념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김구 선생의 동상을 마주하게 된다. 커다란 태극기를 등지고 자신을 찾아오는 시민들을 듬직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선생의 모습이다. 그저 선생의 동상일 뿐인데, 보자마자 가슴에 차오르는 먹먹함을 감출 수 없다. "너는 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선생께서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오직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선생의 일생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감사의 마음에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한동안 선생의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권용

기념관에서 파란만장했던 선생의 일대기를 볼 수 있었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고되고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쌍한 백성들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쉼 없이 투쟁해야 했던 선생의 일생을 되짚어볼 수 있는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선생께서는 왜놈의 국적을 이탈하는 뜻이요, 또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 선생만큼의 애국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호를 '백범'이라고 하셨다. 이제 백범이라는 호의 의미를 떠나 '백범 김구'라는 존재 자체가 대한의 독립이요, 현재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

어린 시절 선생께서는 관료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 자신의 의지와 열정과 상관없이 관료가 아니면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신분차별을 목격한 선생은 자신의 뜻과 의지를 펼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17세가 되던 1892년, 큰 뜻을 품고 황해도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과거시험의 실상을 깨닫고 관료의 꿈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선생께서는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팔봉접주로 임명되었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였다. 선생께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사상에 이끌렸다. 동학에 입도하여 '창수'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열심히 동학교리를 공부, 활발한 포교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동학으로 이끌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통솔하는 능력이 남달랐던 김구 선생! 그랬기에 훗날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더불어 조국광복을 향한 힘찬 진군을 할 수 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 동학을 이끌며 남다른 통솔력으로 '애기접주'라는 별명으로 붙여졌다. 엄정한 군율을 시행하며 동학군을 이끌었지만, 아쉽게도 이에 반대하는 관군과 민보군 공격을 받아 안태훈 진사(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하며 도움을 받는다.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한 사건은 선생의 인생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환점이었다. 사건 당시 백범일지에 "내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조항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는 아니다."라며 당시 선생의 기억을 적었다.

다른 손님들이 자는 새벽, 선생께서는 몸소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였다. 이때 쓰치다에게 빼앗은 돈은 그곳 동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었다. 시체는 우리나라와 국민의 원수로 여겨 강의 고기들로 하여금 원수의 살을 먹게 하라 하셨다. 피비린내 나는 사건 현장에서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구나"라며 시치미를 떼던 선생의 당당한 모습이 자못 자랑스러웠다.

후에 인천감리서에 수감된 선생께서는 신문 과정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의거했음을 당당히 밝혔다. 신문에 참석한 일본 관리에게 명성황후 시해의 잘못을 질타하는 등 의연한 모습을 전혀 잃지 않았다.

"나는 국모 폐하의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으나 재물을 강탈한 일은 없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 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왕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의 씨도 없이 다 없이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 말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선생께서 눈을 감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하늘이 선생을 버리지 않았고, 21세기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다 생각한다. 치하포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극적으로 사형집행이 정지된다. 사형집행 서류를 결제하던 고종 황제가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선생의 죄명을 보고 사형집행을 정지하도록 명을 내렸다. 덕분에 극적으로 사용은 면했으나 일제의 압박으로 석방되지는 못하였다.

생전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 ⓒ권용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호랑이 배에서 어찌 개가 나오리오. 김구 선생 못지않게 어머니 곽낙원 여사 역시 대한의 여장부였다. 민족 영웅 김구를 낳고 기른 어머니, 모든 대한의 어머니라는 말이 거창할까? 여사께서는 선생 못지 않게 대범하고 강인한 분이었다. 선생이 세차례 걸쳐 투옥되었을 때,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선생의 뒷바라지에 소홀하지 않았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아들을 찾아가 면회하며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선생은 "저같이 씩씩한 기질을 가진 어머니께서 왜놈에게 자식을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며 어머니의 강인함에 탄복하였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여사는 1924년 며느리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두 손자를 집접 키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어른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난징에 있을 당시,.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여사의 생신 축하연을 개최 준비를 눈치채고 그 돈을 직접 달라 하였다. 그러면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여 돈을 받고, 그 돈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 운동에 쓰라하고 내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은 물론 원로 독립운동가들도 잘못하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함께 중국 각지로 옮겨 다니며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가, 1940년 4월 충칭에서 생을 마쳤다.

김구 선생은 독립을 맞이한 후 어머니의 동상을 만들어 모시고자 했다. 감옥에 있는 아들을 위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생을 한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인천감옥으로 가는 길에 세워 '어머니의 뜻대로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려는 뜻이었다.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곽낙연 여사의 동상을 마주할 수 있다. 선생께서 어머니의 뜻대로 바른길을 걷고 있는지 돌아보려 했던 것 처럼, 우리는 김구 선생이 겪었던 긴 독립운동에서 고난의 여로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연 여사의 동상. ⓒ권용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1921년 1월 1일)도 볼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1919년 8월 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경무국장은 현재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상하이에 있는 교민들을 보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는 한편 밀정을 찾아내서 처단하는 업무를 총괄하였다. 영화 '암살'에서도 반역자를 처단하는 선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선생께서는 청년들 20여명과 함께 3년 동안 이러한 엄무를 수행하였다.

1922년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의 역할도 맡았다. 내무총장은 현재 행정안전부 장관과 같은 것으로, 임시정부의 내무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방향을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이 심해지자, 내무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키기도 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다. 국무령은 행정수반을 일컫는 것으로 현재의 대통령과 같은 직책이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명칭을 국무령으로 결정하였다.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에 선임되었고, 홍진에 이어 선생께서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다. 선생께서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에게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겨 부득이 취임하였다. 국무령에 선출된 이후 1927년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또한 미주 동포들을 대상으로 '편지 쓰기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재정을 마련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1921년 1월 1일). ⓒ권용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에 의한 독립전쟁의 새로운 '분수령'을 만들었다. 두 의사를 사지로 내몰아야 했던 백범 선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두 영웅은 물론이며, 이들의 위대한 희생을 감수하며 이를 계획했던 김구 선생의 담대함 역시 우리에게 많은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1930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일제 요인에 대한 암살과 식민통치기구 파괴를 위한 특무대를 조직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 선생에게 맡겼다. 선생은 경무국장 시절부터 많은 청년들과 함께 활동한 경험을 살려 이들을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하루는 어떤 청년 동지 하나가 선생을 찾아왔다. 우리말과 일본말을 섞어 쓰며 임시 정부를 일본말로 부르기에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는 청녕이었다. 며칠 후 술자리에서 그 청년, 바로 이봉창 의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오?"

선생은 그날 밤 이봉창 의사를 찾았다. 이때 선생에게 상하이에 온 뜻을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웃고 있는 이봉창 의사의 사진을 보며 항상 생각했다. 어떤 사진이길래 저리 해맑게 웃고 있을까? 의사께서는 김구 선생에게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박읍시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덕분에 김구 선생 역시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선생께서는 천황 저격을 위한 폭탄과 여비 등을 준비하여 이봉창 의사와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뒤 '이봉창이라는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맞지 않았다'라는 도쿄 전보가 중국 신문에 게재되었다. 비록 천황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정신적으로 일왕을 죽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정신은 '강도 일본'에 빼앗기지 않고 당당한 국가로 싸우고 있따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칭다오의 <국민일보>는 특호 활자로 '이봉창이란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고 썼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중국 정부에 엄중히 항의한 결과로 '불행'자를 쓴 신문사는 모두 폐쇄당했다.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사건에 이어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찾아온다. 윤봉길 의사 역시 도쿄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신을 써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선생께서는 폭발력이 강한 폭탄을 제작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동경 의거에서 사용하였던 폭탄의 폭발력이 약했던 점을 대폭 보완하려는 목적이었다. 폭탄은 여러 번의 시험을 거쳤고, 선생은 직접 시험장을 방문하여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시락과 물통으로 된 두 개의 폭탄이 완성되었다.

의거일을 눈앞에 두고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함께 식사를 했다. 윤봉길 의사는 떠나면서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 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선생과 시계를 바꾸었다. 윤봉길 의사를 태운 자동차가 움직이자 선생께서는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오후 1시쯤이 되어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커우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 일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대기 시작했다.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일본인 민단장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 야촌 중장 등 문무 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며칠 후 선생께서는 홍구 폭탄 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리하여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와 상하이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선생이라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나눈 시계. ⓒ권용

 선생의 일대기와 업적을 나열하자면 너무 많아 이번 기사에 모두 언급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만 훗날 백범일지를 바탕으로 아주 자세히 김구 선생께서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하고자 한다. 일단 많은 분들에게 '백범일지'를 꼭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선생께서는 아비의 흔적을 자식들이 제대로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하셨다. 이때 선생께서 생각한 자식은 누구였을까? 훗날 이 땅에서 살아갈 모든 후손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으리라 충분히 짐작이 간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강인한 남자였지만 자신이 겪었던 숱한 고난들, 고통받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땀과 눈물로 정성을 들였다. 또한 세상 어느 나라보다 강한 국가, 문화적으로 발전된 대한민국을 상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 하시지 않았을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백범의 정신은 아직도 이 땅에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비록 지금 우리가 총칼을 들어 일본에 맞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일본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보며 지난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저들은 지난 역사적 과오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어떤 순간보다 오로지 민족의 독립만을 생각했던 김구 선생의 뜨거운 열정이 필요한 시기이다.

백범 일지. ⓒ권용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께서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이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쓰신 선생게서는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을 당하셨다. 선생은 사전에 암살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했는데 동포가 어찌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암살자 안두희는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았다. 또한 국납업체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고 권력층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김구 선생 암살에 대해 다른 배후가 있을 것이라 충분히 추정은 하지만 아직까지 그 배후가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조선, 일제강점기와 힘겨운 독립의 시기까지 겪으며 마지막에는 민족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던 김구 선생. 선생께서는 독립 이후에도 이 땅이 이념으로 인해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독재로 인해 만인이 한 개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따. 그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만이 우수하고 잘살아야 하는 이기적인 국가의 모습이 아닌, 전 세계가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는 세계동포주의까지 보이셨다. 백범일지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소원'을 읽어보면 선생께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어쩌면 백범일지를 쓰시며 현재 2000년대의 모습까지도 미리 앞서 예견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착각까지 든다.

선생께서는 1949년 7월, 이곳 효창공원 옆에 모셔졌다. 당시 온 민족의 존경과 애도를 담아 국민장으로 모셨다고 한다. 분명 이자리에서 기쁜 마음으로 후손들을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생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자주국방의 민주주의 국가로, 전세계가 칭송하는 문화의 국가로 발전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해 나아가리라 기대한다. 간절히 독립을 바라던 선생의 의지와 뜻을 이 땅의 후손들은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 조상들이 그래왔듯이 현재의 우리, 이 땅의 모든 후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다.

 기념관 바로 옆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열사'가 있다. 효창공원 맨 꼭대기, 백범김구기념관 입구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기념관과 함께 꼭 둘러봐야 할 장소이다.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독립운동가 7인의 위패를 모셨다. 김구 선생의 위패 역시 이 곳에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백범김구기념관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이봉창 의사의 동상을 마주한다. 비록 그의 폭탄이 일왕의 심장을 꿰뚫지는 못했지만,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동시에 우리민족의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나라를 훔친 왜적의 우두머리를 처단하고자 했던 이봉창 의사의 과감함과 결단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모습을 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따. 비록 이봉창 의사께서 지금 이 땅에 없지만, 왜왕을 향해 던졌던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 모든 국민들의 바람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있다. 최근 아베정권의 무차별적인 수출규제에 대한 일본제품불매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구 선생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무척 막막했다. 백범일지도 다시 펴서 읽었지만 쉽게 해답을 얻지 못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향했던 '백범김구기념관'. 선생께서 태어나고 눈을 감으신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우리 독립운동사 그 자체이자 한민족의 열망은 백범 선생의 인생역정에 그대로 녹아있다. 중국에서 힘겹게 이끌어오신 임시정부와 독립, 그리고 최후까지 한민족의 단합을 주장하셨던 이 땅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기록과 사진으로나마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로지 나라와 민족, 독립과 대한민국의 굳건함, 세계의 평화를 꿈꿔온 인류의 지도자이셨구나.

백범김구기념관은 꼭 다녀오라고 많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더불어 백범일지도 함께 읽으며 독립운동가들의 값진 희생 역시 가슴에 새겨야 한다. 내가 지금 이 땅에 두 발을 닿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앞으로도 더욱 간절히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한반도 위에서 내게 주어진 사명,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진정어린 고민을 다시 하게 된다. 비록 총칼을 들고 나라를 위해 싸울 수는 없지만, 김구 선생과 마찬가지로 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진심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광복절, 그리고 2019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백범 김구 선생입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