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최희영의 고려아리랑 ⑩]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청년 대상 ‘영화아카데미’ 현장 리포트(2)

최희영 전문기자
  • 입력 2019.08.04 17:35
  • 수정 2020.02.12 17: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감독 출신 강사들의 열정과 수강생들의 열공 자세가 빚어낸 또 다른 감동의 ‘한-중앙아’ 합작품

[타슈켄트=최희영 기자] 강사는 ‘소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소풍’의 중요성으로 이해했다. ‘영감(靈感)’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잠시 뒤 ‘영감’ 배역을 맡은 남학생이 엄지척을 내세워 빵 터졌다.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소통이 문제였다. 강사가 우리말로 강의하면 한국어를 제법 하는 조장이 이 나라 말로 통역한다. 그러다보니 가끔씩 희한한 해프닝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조차 즐겁다. 현장에서는 매일 웃음이 터진다. 웃다 보니 어느덧 2주를 넘기고 이제 마지막 한 주만 남게 됐다.

“이 친구들, 갈수록 빠져들어 이제는 그만 하고 집에 가자고 해도 떼를 씁니다. 조금 더 하고 가자고요. 두 주쯤 지나다보니 이젠 제법 언어적 소통도 원활해 진척이 빠릅니다. 다음 한 주 동안은 편집에 몰두할 텐데, 어떤 작품들이 나올지 기대가 큽니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인선 감독(연출), 유수민 감독(시나리오) 장주일 감독(촬영), 김호 감독(편집)이다. ⓒ최희영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인선 감독(연출), 유수민 감독(시나리오) 장주일 감독(촬영), 김호 감독(편집)이다. ⓒ최희영

타슈켄트 현지에서 2주째 <청년고려인 영화아카데미 in 우즈베키스탄>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의 김용훈 교육단장. 그는 주말인데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와 촬영현장을 누비고 있다며 대견스러워 했다. 더불어 학생들의 그 같은 ‘열공’에 부응하느라 주말도 반납한 강사들 역시 참 대단한 ‘쟁이’들이라며 흡족해 했다.

벌써 2주가 지났다. 수업 첫 날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황망했다. 자기소개서에 쓴 것과 달리 지원자들 대부분은 한국어가 서툴렀다. 듣기, 말하기, 쓰기까지 잘 되는 학생은 단지 몇 명뿐이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이었다. 다들 “아이쿠 이거 큰일 났다”는 표정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학생들을 데리고 영화 이론수업을 병행하며 3주 만에 10분물 단편영화를 만들어 낸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인생에도, 영화에도, 항상 반전이 있지 않던가. 한국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영화제작 수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반짝거리는 학생들의 눈빛이 감독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국의 젊은 감독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 봅시다.” 감독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수강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감독들의 결기가 합쳐지자 교실이 후끈 달아올랐다.

시나리오 수업. 자신의 시나리오를 다섯 칸에 그려오기 과제 제출 후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재치 있고 놀라운 발상들이 많았다. ⓒ최희영
시나리오 수업. 자신의 시나리오를 다섯 칸에 그려오기 과제 제출 후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재치 있고 놀라운 발상들이 많았다. ⓒ최희영

2주차 이론수업은 속성으로 진행됐다. 연출, 시나리오, 촬영, 편집 등 한 편의 영화가 제작되는 전 과정을 1주일 만에 마스터했다. 속성으로 진행됐으나 내용은 그 어떤 강의보다도 튼실했다. 그런대로 한국어가 능통한 학생을 각각의 조장으로 세우고, 강사들이 각각 한 조씩을 맡아 담임교사가 되었다.

가장 큰 감동은 파트별 수업을 맡은 강사들의 수업준비였다. 수강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철저한 맞춤 준비였다. 각각의 이론에 맞는 한국영화를 준비해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였다. 오전에 고개를 갸웃하던 학생들도 오후로 가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 수업 난이도가 조금씩 올라갔다. 오후 3시쯤 되면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어컨 바람이 익숙하지 않은 수강생들을 배려해 온도를 가급적 높였다. 그러다보니 강사들의 얼굴은 실내임에도 벌겋게 익었다. 하지만 강사들은 그조차 즐겼다.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든 수업자료를 통해 학생들의 실력을 조금씩 높여갔다. 노련한 노하우다. 그러면서 차츰 자발적인 방과 후 수업까지 끌고 갔다.

강사들의 이 같은 노고에 화답이라도 하듯 학생들의 열정과 노력이 보태졌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2분짜리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편집해 오라는 숙제를 냈다. 김 에르네스트 학생은 이를 위해 주말을 이용해서 도심에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침간산까지 다녀왔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손을 다쳐 깁스까지 해야 했다. ‘찾아가는 영화교실’을 통해 확인한 건 고려인 학생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만이 다가 아니었다. 김용훈 단장은 “고려인 청년들이 영화를 제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의 역사적 조국인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는 기쁨이 더 크다”고 말했다.

연일 계속되는 땡볕에도 불구하고 감독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카메라촬영을 배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45도의 기온보다 학생들의 열정이 더 뜨거웠던 날이다. ⓒ최희영
연일 계속되는 땡볕에도 불구하고 감독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카메라촬영을 배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45도의 기온보다 학생들의 열정이 더 뜨거웠던 날이다. ⓒ최희영

“사실 저는 그동안 한국을 너무 몰랐습니다. 솔직히 우리와 가깝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그래서 한국말도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제작 과정을 통해 배운 것도 많고 느낀 점도 많아요. 우선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 게 되었고요, 한국문화를 이해하게 되면서 한국을 아주 가깝게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일 큰 수확은 한국말이에요. 한국선생님들과 영화수업을 하다 보니 한국말이 저절로 많이 늘었습니다. 먼저 우리들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한국선생님들께 감사하고요, 우리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청년들에게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신 영화진흥위원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김블라디미르)

“이번 영화수업에 참가하면서 한국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영화를 많이 보다 보니까 그동안 잘 몰랐던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문화를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빨리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으나 수업시간에 편집에 대해 배우고 나서는 나도 영화편집가가 되고 싶다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세종학당에서 공부를 마치면 꼭 한국으로 유학 가서 영화전문가 과정을 밟겠습니다.” (최올가).

“저는 고려인 학생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전에는 그냥 한국 드라마, 케이팝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데, 이번 아카데미 강의를 들으며 한국과 한국영화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오래전부터 교류를 해왔던 관계라는 것도 알았고, 한국 사람들도 우리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처럼 착하고 부지런하며 정이 많은 민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영화를 보니까 우리 우즈베키스탄과 달리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다양했어요. 저는 그런 모습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더욱 잘 알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압둘라예바 아살)

영화이론수업 전 과정을 마친 후 조별 토론 과정을 거쳐 적성과 능력에 맞는 역할을 배정하고 있다. 조별 토론 분위기가 재밌다. 어떤 조는 너무 진지하고 어떤 조는 매우 유쾌하다. ⓒ최희영
영화이론수업 전 과정을 마친 후 조별 토론 과정을 거쳐 적성과 능력에 맞는 역할을 배정하고 있다. 조별 토론 분위기가 재밌다. 어떤 조는 너무 진지하고 어떤 조는 매우 유쾌하다. ⓒ최희영

지난 2주 동안 김용훈 단장을 중심으로 신세경 주임, 박예솔 선생, 서혜진 선생 등 전 스텝들이 똘똘 뭉쳐 강사들의 수업을 지원했다. 박빅토르 회장 박리타 부회장 이하 고려인문화협회 회원들과 한 블라디슬라브 선생, 고려신문 발행인 등 현지 고려인 매체 기자들의 응원과 격려도 이어졌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업 현장을 찾는 우즈베키스탄 기자와 사진가, 그리고 음향 담당선생과 운전기사, 심지어 건물 관리인과 청소하는 아주머니까지 한 마음이 되어 수업을 도와줬다.

이제 마지막 한 주를 남겨두고 있다. 이미 시나리오도 나왔고, 감독, 촬영감독,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배우, 녹음 등, 각각의 조별 역할도 모두 정해졌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 시간은 3일 토요일 한낮이다. 하지만 감독과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미리 헌팅해 둔 촬영현장에 나가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하루 종일 땡볕이 내려쪼였다. 그래도 즐겁단다. 멋지다. 영화제작 과정이 멋지고 젊음이 멋지다.

준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에서의 영화아카데미 수업도 1년이다. 그런데 영화 초급 수준도 안 되는 고려인 청년들을 데리고 3주 만에 10분물 단편영화를 만든다니 기적이다. 그러나 지난 2주 과정을 지켜본 기자로서는 이를 믿게 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과 문성근 위원의 합작품이란다. ‘한-아세안 영화기구’(ARFO)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까지 시선을 돌린 그들의 폭넓은 안목이 지혜롭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