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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김종삼 시인의 드빗시 山莊 17

박시우 시인
  • 입력 2019.07.19 17:01
  • 수정 2019.09.2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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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현악사중주 제15번 3악장
병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

여러 날 동안 여러 갈래의 사경을 헤매이다가
살아서 퇴원하였다.
나처럼 가난한 이들도 명랑하게 살고 있음을
다시 볼 수 있음도
익어가는 가을 햇볕과
초겨울의 햇볕을 즐길 수도 있음도
반갑게 어른거리는
옛 벗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음도
主의 은총이다.
-김종삼 ‘오늘’ 전문

▲부슈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사중주 제15번. ⓒ박시우
▲부슈사중주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현악사중주 제15번. ⓒ박시우

1983년 1월 『여성중앙』에 발표된 시입니다. 김종삼 시인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쓴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무렵 김종삼은 오랜 폭음으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종삼은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불치의 지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마시겠다고 한 술은 폭주로 돌변하곤 했습니다. 술병이 악화되어 겪는 엄청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고 다짐까지 했습니다.

이 시는 병석에서 일어나 바깥세상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단순하면서도 다소 명랑한 어조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잠시나마 병에서 회복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사소한 일상에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베토벤도 이와 비슷한 심정을 음악에 담았습니다. 후기작품에 속하는 현악사중주 제15번으로 3악장 몰토 아다지오에는 '병에서 회복된 자가 신께 드리는 리디아 선율에 의한 감사의 노래'라는 긴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난 베토벤의 숭고한 음악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감동적인 악장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거나, 깊은 병에서 회복한 사람들은 매일 보는 사람이나 햇살 한 줌, 바람 한 줄기도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생사의 문턱을 오갔던 김종삼과 베토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관조나 체념의 경지에 들어서면 작품도 기교나 힘을 빼고 부드럽고 단순한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베토벤의 만년 음악들은 인간의 고양된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심오한 경지를 펼쳐냅니다.

1939년에 녹음한 부슈사중주단의 연주는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는 명연입니다. 당시 전운이 짙게 드리운 유럽의 분위기처럼 시종일관 비장하고 엄숙한 태도로 19분39초 동안 베토벤의 고해성사를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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