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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박인 작가
  • 입력 2019.07.19 11:36
  • 수정 2019.09.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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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적음과 B와 나는 소주를 깡으로 마셨다.
“형님, 저를 거두어 주세요. 출가하게 도와주세요.”
“이 새끼 웃기는 놈이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그해 여름,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적음 형을 따라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우간다에나 있을 법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이 나라에서 일어났다. 이디 아민 다다처럼 군인이 독재자가 되어 광주에서 시민들을 죽였다. 저항하거나 항변하는 자들은 끌려가거나 입에 재갈이 물렸다.

앞날의 희망이 사라지자 나는 적음의 바랑을 메고 그의 걸음을 따랐다. 청량리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봉화역에서 내렸다. 버스를 갈아타고 나는 빨치산처럼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 후배 B를 데리고 갔다. 일주일간 적음과 흑석동 개미집과 서울 변두리 술집들을 주유하며 술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가슴이 타들어 가고 답답했다. 분노와 체념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하여 무작정 청량사에 딸린 암자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MandalaⅡ』 1600×1600㎜, Mixed media, 박인作
▲『MandalaⅡ』 1600×1600㎜, Mixed media, 박인作

바랑 안에는 소주가 스무 병가량 들어있었다. 그 무렵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성경처럼 끼고 다녔다. 나는 인간으로선 실격에 가까운 놈이었다. 해독이 어려운 죽음이나 탐미하려는 비관주의자 행세를 마다하지 않았다. B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허망했다. 왜? 하필이면 나를 좋아하냐? B에게 물었다. B가 즉시 답했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는 게 죄냐고. 세상에 수많은 남자 중에 어쩌자고 나를 사랑했을까. 고백을 받은 날 막걸리를 마시고 엉망으로 취했다. 결혼서약서를 쓴 나는 B를 끌어안고 연못시장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잤다. 아름다운 사랑은 없었다. 그렇고 그런 연애 이야기는 많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불꽃이 튀던 시절이었다.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적음과 B와 나는 소주를 깡으로 마셨다. 누구를 사랑할 능력도 없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를 사랑한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영장류에 버금가는 미숙한 인간이었다. 나는 인간이 되기 위한 수련이 필요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 편에 붙어 잘 먹고 잘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적음은 스님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적 외로움이 내게 전해졌고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따르는 수제자가 되고 싶었다.

“형님, 저를 거두어 주세요. 출가하게 도와주세요.”
“왜? 출가하려는고?”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리며 적음이 물었다.

“형님과 술친구 하며 수발하려고.”
그는 형형한 눈길을 주며 파안대소했다.
“이 새끼 웃기는 놈이네.”

사실은 절이든 산이든 처박혀 소설이나 써볼까 궁리하던 중이었다. B가 여자가 아닌 소설이라면 죽도록 쫓아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소설인 B가 나를 좋아한다고 계속 따라다니면 지긋지긋할 것이다.

적음을 따라 암자에 도착한 나는 소설을 증오했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나는 응진전이라 불리는 암자 뒤 동양화처럼 펼쳐진 금탑봉을 닥치는 대로 도화지에 옮겼다. 아무리 폭음을 해도 새벽 네 시면 적음은 나를 깨워 응진전으로 갔다. 촛불을 켜도 불당 안은 어두웠다. 목탁을 두드리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독송하는 적음을 따라 삼존불상에 새벽 예불을 드렸다. 삼배를 올리는 동안 눈물이 났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생각했다.

“보시 중에 최고는 육보시야. 네가 나를 좋아하듯 나도 허물없이 적음을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그를 네가 사랑하면 어떨까?”
나는 B에게 넌지시 말했다.

암자 옆 요사에 들어가서 술과 안줏거리를 챙기는 건 내 몫이었다. 나는 바랑을 메고 도립공원 입구까지 십리 길을 이틀이 멀다 오르내렸다. 밤이면 찌개 안주를 끓였다. 절벽 위 너럭바위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다 마신 소주병은 차례로 절벽 밑으로 던졌다. 병이 깨지면 정적이 엄습했다. 온갖 풀벌레와 새 울음소리가 순간 멈췄다. 흐르는 달빛 아래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었다. 정적을 깨자 기다렸다는 듯 풀벌레와 새들이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B는 인간 실격인 나를 버리고 적음에 갈 것이다. 낮이면 연필과 도화지를 챙겨 들고 무당들이 기도처로 삼은 산정 바위들을 그렸다. 적음은 스님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그 인간성을 위해 나는 적음과 B가 둘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B는 나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사랑 따위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B는 보란 듯이 그에게 갈 것이다. 나는 만나고 헤어짐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풀처럼 푸를 것이다. 푸른 나는 술로 몸을 학대했다. 내 육신은 머리를 장식처럼 달고 다녔다. 그 벌을 받을 차례였다.

청량사 주지 스님에게 두 번이나 불려가 훈계를 받은 나는 보름 만에 산에서 내려왔다. 친구들은 ‘민중의 땅’ 사건 이후 모두 안기부에 끌려갔다. 나는 도망쳤을 뿐이었다. 어디로 갈까. 만남도 이별도 없는 곳으로?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마저도 지나갈 일이었다. 봉화역에서 나는 적음과 B를 서울로 올려보내고 안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B는 적음을 수발했을까. 적음에 보시했건 안 했건 나는 그녀를 떠나보냈을까. 연연하지 않으리라. 인연을 단칼에 끊으면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무렵 나는 몰랐다.

대학을 졸업한 해였다. 이민을 떠나기 전날, 적음은 나를 불렀다. 적음 곁에는 보살이 된 B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적음은 내게 주발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것도 가래침을 잔뜩 뱉어서 주었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의 유전인자가 내 뱃속으로 들어오자 몸이 따뜻해졌다. 장식으로 이고 다니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육조대사 혜능의 빙의가 내게 들어와 저절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만나지 말아라. 헤어지기 어렵나니. 헤어지지도 말아라. 다시 만나기는 더 어렵나니라. 그리하여 나는 심심하다.”

후일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상에 내쫓기며 홍대 입구 버스정거장으로 걸어갈 때 딱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B를 만났다.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주었다. 나는 결혼해서 애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었지만 그녀는 아직 독신이었다. 급히 버스에 올라 그녀를 바라보자 B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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