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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기행 1] 라카인주(州)의 시트웨(Sittwe) 사람들

이해선 전문기자
  • 입력 2019.06.26 18:00
  • 수정 2019.09.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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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만 전망대에 올라 해 저무는 만(灣)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강을 따라 흘러 온 물고기와 뱅골만에서 살던 물고기들이 어울러 낯가림하는 수런거림이 들려왔다. 문명의 충돌도 이러했으리라, 칼라단강은 긴 여정을 끝내고 벵골만 너른 바다 품에서 장엄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자마 모스크 ⓒ이해선 이곳에선 2012년 폭탄테러가 있었다. 로힝야 무슬림이 라카인족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이 촉발한 폭동은 폭탄테러로 이어졌다.

미얀마 라카인주(州)는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으로, 미얀마 소수민족 중 하나인 아라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아라칸의 주류는 미얀마계 아라칸들이고, 방글라데시에서 이주해 온 로힝야들은 주로 라카인 북부에 모여 산다.

영국 식민지 시절 라카인주는 세계 최대 쌀 생산지였고, 뱅갈 남부로부터 수많은 인도계(현 방글라데시)사람들이 이주해 와 쌀농사에 투입되었다. 이 시기 인도계 이주민들, 즉 로힝야들은 영국의 비호아래 실질적인 지배층으로서 라카인주 쌀 생산과 수출에 주도권을 행사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되었을 때, 로힝야는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긴 했지만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들의 권한은 물론이고, 불법이주민으로 간주 시민권까지 제한시켰다.

로힝야족 반군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은 오랜 세월 로힝야들을 차별하고 박해한 미얀마 군부를 상대로 항전을 선포하고 2016년 라카인주에서 경찰 초소 등을 습격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얀마 군부는 ARSA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대규모 토벌작전을 벌렸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남은 로힝야들은 방글라데시로 피신하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해선

시트웨(Sittwe)

미얀마 변방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 도시 중앙 광장에 낡은 시계탑 하나 유적처럼 서 있고 시계바늘은 대영제국 시간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시계탑은 빅벤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자발적 유민이 되어 있었다. 한낮의 적요를 뚫고 오토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택시)를 모는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 이름은 마웅이라 해요.”

그는 론지(미얀마 사람들이 입는 치마)의 허리춤을 풀었다 다시 묶으며 밍글라바 하고 두 손을 모았다. 그가 입은 낡은 론지 무늬 위로 남국의 한낮 태양이 비스듬히 쏟아져 내렸다. 그 빛 너머로 유년의 기억 속 아버지 셔츠 무늬가 떠올라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차를 타지 않겠어요?”

그는 오토릭샤 의자를 손으로 털면서 환하게 웃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큰 청년은 영국 맨체스터 로고가 새겨진 붉은 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축구 좋아하세요?”

나는 청년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혹시 몽몽틴을 아세요?”

이방인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눈만 껌뻑거렸다. 70년대 초 쯤 이었을까, 티비에서 한국과 버마 축구 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중계를 하던 아나운서는 몽몽틴, 몽몽틴을 연호했다. 그 이름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지는 불가사의했다. 다만 저 청년을 보는 순간 그 몽몽틴이라는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의 표정으로 봐서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몽몽틴이 로힝야족 이름인가? 내 중얼거림에 로힝야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해선 므락우 가는 배 타는 선착장
ⓒ이해선 므락우 가는 배 타는 선착장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 간다고 했을 때 양곤에 있는 숙소 주인은 그곳은 로힝야족 반군이 활동하는 곳이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대사관에 문의해본 결과 반군들은 주로 라카인주 북부에서 활동하니 주도인 시트웨 부근은 괜찮을 거라 말했다.

“로힝야, 그들은 미얀마 국민이 아니에요. 뱅갈리에요.”

뱅갈리란 방글라데시에서 들어 온 불법 이주민, 즉 로힝야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고 우리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아라칸 왕국에 가려 해요. 배 타는 곳까지 태워 주세요. 부탁이에요.”

돌아서 가려던 그가 아라칸이란 말에 반응했다.

“미아우에 가시게요? 버마족 사람들은 므라욱 우(Mrauk-U)라 발음하고 우리 아라칸들은 미아우라 해요. 미아~우~~” 그는 우~ 소리를 길게 내며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우리 아라칸들은 매년 12월이 되면 미아우에서 아라칸 왕조를 기념하는 큰 행사를 열지요. 그곳에 갈 수 있는 제티 사이트까지 제가 태워다 드리지요. 저도 아라칸왕조의 후예입니다.” 언짢았던 그의 기분이 많이 좋아보였다.

다운타운 거리는 한산했고 사람들은 나른해보였다. 이 도시는 영국 식민지 시간에서 멈추어있는 것 같았다. 조지오웰의 소설 ‘버마시절’ 주인공이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웅이 길섶 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저 나무에 박쥐들이 살아요.”

마웅이 가리키는 나무에 박쥐들이 새까맣게 매달려 있었다. 박쥐들이 동굴에서 밀려나 난민이 되었다.

ⓒ이해선 시트웨 뱅갈만 뷰포인트
ⓒ이해선 시트웨 뱅갈만 뷰포인트

박물관 옆을 지나는데 유적처럼 폐허가 된 건물이 보였다. 마웅이 박물관 입구에 차를 세웠다. 무장 군인이 입구를 막아섰다. 미나렛이 있는 걸로 보아 무슬림 모스크 같아보였다. 기도소리 멈춘 지 오래 된 것 같았고, 웃자란 야자수들이 알라신을 경배하고 있었다. 알라의 시간이 아라칸의 땅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저곳이 자마 모스크라 아웅이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이곳에선 2012년 폭탄테러가 있었다. 로힝야 무슬림이 라카인족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이 촉발한 폭동은 폭탄테러로 이어졌다. 제티 사이트는 벵골만을 따라 깊숙이 들어 온 강변에 있었다.

“이곳에서 아라칸의 고도 미아우(Mrauk-U)가는 배를 탈 수 있어요.”

마웅은 인도인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생색을 냈다. 낡은 화물선들이 밀물 들어 올 시간을 기다리며 갯벌에 몸통을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매표소 늙은 사내는 러폣예(미얀마식 밀크티)를 홀짝이며 오늘은 배가 뜨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오후 제가 이 도시를 안내해 드릴까요?”

마웅은 오토바이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나를 태워 미아우까지 떠날 기세였다.

“칼라단강이 벵골만과 합쳐지는 곳에 날 데려다 줘요.”

그의 오토바이는 신이 나서 해안도로를 달렸다. 강을 따라 흘러 온 부평초들이 맹그로브나무 숲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벵골만 전망대에 올라 해 저무는 만(灣)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강을 따라 흘러 온 물고기와 뱅골만에서 살던 물고기들이 어울러 낯가림하는 수런거림이 들려왔다. 문명의 충돌도 이러 했으리라, 칼라단강은 긴 여정을 끝내고 벵골만 너른 바다 품에서 장엄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시트웨 어시장

밤새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날 태우러 오기로 했던 오토릭샤 기사 아웅은 비가 너무 많이 와 올 수 없다며 문자를 보냈다. 시계는 5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해 문을 열어보니 숙소 매니저가 창으로 넘쳐 들어 온 빗물을 퍼내고 있다 수줍게 인사를 한다. 새벽 생선시장은 5시부터 열린다고 했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행히 비는 조금씩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지도로 확인을 해 보니 숙소에서 불과 2km 남짓한 거리였다. 날씨만 좋다면 그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찾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우비를 챙겨 입고 나서려니 숙소 매니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산 하나를 손에 들려주며 조심히 다녀오란다.

어제 봐 둔 시계탑을 등대 삼아 어두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우비에 모자를 깊숙이 둘러썼고, 우산까지 썼으니 로힝야족 반군인 ARSA가 나타나더라도 이방인 여성이라고는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 시계탑 사거리에서 나는 길을 잃고 반대편 방향으로 계속 걸었던 것이다. 비는 다시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비록 미얀마의 변방이긴 하지만 라카인 주의 주도(主都)인데 이렇게나 사람의 왕래가 뜸 할까? 밤사이 이 도시의 사람들을 딴 곳으로 소개시켜버린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빗줄기 사이로 한줄기 불빛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불빛은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트럭인 툭툭이었다. 툭툭이가 내 앞에 섰고 나는 무조건 타고 보았다. 운전수는 채 소년티를 벗지 않은 앳된 청년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나 형의 툭툭이를 시험 삼아 끌고 나온 모양새였다. 피쉬마켓을 가겠다고 했더니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방향이 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려 타박타박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소년이 차를 돌려 내게로 다시 왔다. 날 그곳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가는 방향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툭툭이를 몰았다. 내가 스쳐왔던 시계탑을 지나고 반대방향을 지나자 다른 시계탑이 또 나타났다.

아! 세상에나! 시트웨에는 두 개의 시계탑이 있었던 사실을 몰랐던 것이었다. 시계탑을 지나 길을 꺾자 비릿한 내음이 코끝에 와 닿았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는 온 몸으로 바다가 가까워짐을 알아채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코를 킁킁대며 피쉬! 피쉬를 외쳤다. 어둠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시장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컴컴한 시장 입구에 툭툭이를 세운 소년은 차에서 내려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왕 손님 태우고 온 김에 생선이라도 사가려는 것일까? 소년은 내가 인파속에서 길을 잃을까봐 계속 뒤돌아보며 걸었다. 이제 소년이 없어도 저 행렬을 따라가면 어시장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긴 시장 통을 지나자 드디어 생선 위판장이 나타났다. 뱅골만 바닷물이 만 깊숙이 밀고 들어와 칼라딘강을 마중했다.

앞서 가던 소년이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이곳이 피쉬마켓이라 했다. 나는 그의 손에 서운치 않을 만큼의 보너스 짯(미얀마 화폐)을 쥐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시트웨 소년을 바라보는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여행 중, 길 위에서 스승 하나를 또 만난 것이다.

ⓒ이해선 어시장 경매가 끝나고 사람들은 이곳 카페에서 러펫예를 마시며 정산을 한다.
ⓒ이해선 어시장 경매가 끝나고 사람들은 이곳 카페에서 러펫예를 마시며 정산을 한다.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생선 공판장은 작은 렌턴 불빛에 의지해 경매가 시작되었다. 감청색 하늘과 바다가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아라칸 불탑을 찾아가는 순례 길이었는데 나는 왜 이곳 비린내 나는 저잣거리에서 낯선 새벽을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이해선 시트웨 어시장

청년들이 비를 맞으며 자기보다 덩치가 큰 가오리를 거북이처럼 등에 업고 공판장을 누볐다. 칼라딘강과 뱅골만이 합쳐지는 이곳은 미얀마 북부 최대 어시장이라 했다. 큰 전갱이도 보이고 사람 키만큼 큰 장어들도 보였다. 빗물과 바닷물에 젖은 사람들의 얼굴이 푸른빛 여명에 번들거렸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들도 현장에 투입되어 일을 거들었다. 어린 소년이 빗물에 쫄딱 젖어 벌벌 떨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은 내가 본 미얀마 사람들하고는 좀 달라보였다. 얼굴이 검고 눈들이 부리부리 깊고 컸다. 뱅골만을 끼고 있는 이곳은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경매가 끝난 생선들은 노점상들에게로 넘어가 본격적인 좌판이 벌어졌다. 날이 밝아오면서 인파는 점점 더 늘어났다. 이곳 사람들 모두가 이 시장으로 몰려 온 것 같았다. 비를 맞으며 어린 승려들은 맨발로 탁발에 나섰고, 생선 좌판을 벌인 아낙들은 어린 탁발승의 그릇에 느꺼워하며 보시를 하였다. 꽃을 안고 다니며 꽃 파는 아낙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생선과 꽃이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묘한 풍경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 노점상 아낙이 꽃장수로부터 과꽃 한 다발 사서 시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생선을 팔고 있었다. 꽃의 향기와 생선 비린내가 만나면 어떤 향이 먼저 날까!

전갱이 한 마리 사서 구워 먹고 싶었지만 여행자 신분에 가당키나 한 바램인가 말이다.

ⓒ이해선 한국인만 보면 마치 한류스타 대하듯 반긴다.
ⓒ이해선 한국인만 보면 마치 한류스타 대하듯 반긴다.

시트웨 사람들

뭘 좀 먹어 볼까 하고 길거리 국수집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곳 대부분의 식당들은 노점상이었다. 숯불 화덕에서 국수를 볶고 있던 젊은 아낙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두 손을 모으며 밍글라(미얀마 인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내 행색을 살피더니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한국에 가 본 적 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 했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말 배웠다며 한국 아줌마! 하고 환하게 웃었다.

ⓒ이해선 시트웨 거리의 박카스 광고판
ⓒ이해선 시트웨 거리의 박카스 광고판

국수 볶던 그녀는 주걱을 팽개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국수라도 한 그릇 먹어 볼 요량이었는데,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한국 아줌마는 졸지에 가게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길거리 식당이지만 그릇들은 반질반질 잘 닦여 윤이 났고, 식재료들은 싱싱하고 정갈해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남편을 비롯한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났다.

이곳은 미얀마 유명관광지와는 다르게 한국인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어서 한국 사람들 볼 기회가 없었다며 그들은 나를 마치 한류스타 대하듯 했다. 그녀는 곁에 서 있는 사내를 오빠라며 소개 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 게 확실해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자기야 사랑해, 오빠, 등의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쓰는 일상용어들이 뱉어져 나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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