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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로 시] 콤포스텔라

윤한로 시인
  • 입력 2019.04.29 08:28
  • 수정 2019.09.2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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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포스텔라

      윤 한 로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가

얼마나 가난하지 못한가

먼 들판에 별, 콤포스텔라

부르트고 깨지며 걷습니다

노란 화살표 달고

조개껍데기 달고

얼굴엔 애법, 먼지 수염 덥수룩

눈 뜨면 걷고

밥 먹으면 갑니다

바위 틈바구니, 으슥한 잡목 구렁

오줌 똥 누고 나서

또 걷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사람들이 싫어지고, 역겨워지고

온통 말이 싫어지고

마음속 숫한 헐뜯음, 솟구치던

미움들도 하나 하나 싫어집니다

왜 이렇게 걸어야 하나

꼭 이렇게 가야만 하나

마침내 바보가 되어

너덜너덜 저절로 갈 때

황토 발 두 짝

빛나는 들판 별이 됩니다

 

 

시작 메모

지난가을 들판의 별’,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한 달 길을 걸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걸었다. 그러나 가는 동안 무수한 관계, 말들 다 버리고 나중에는 모두 다 혼자가 됐다. 길고 힘든 먼 길, 사람들은 자신을 찾아서, 신앙을 찾아서, 희망을 찾아서, 하다못해 걷는 게 좋아서 들로 순례 의미를 두었다. 그런데 웬걸, 나는 된통 미움만 만나고 왔다. 세계에 대해, 삶에 대해, 남에 대해, 아내에 대해, 자식에 대해, 나에 대해, 잠자리에 대해, 음식에 대해, 걷는 목적에 대해. 마지막 콤포스텔라까지 나를 이끌어 준 건 너덜너덜 누더기가 다 된 발이었다. 그리하여 황토 발 두 짝, 마음보다 영혼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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