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당나귀 신사(78) - 사내라는 존재

서석훈
  • 입력 2011.10.15 15: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영창(소설가, 시인)
우리는 도도녀가 백화점에서 장시간 쇼핑을 한 후에는 억누를 수 없는 영혼의 허기로 인해 백화점 꼭대기 전속 화랑에서 그림을 감상하고야 만다는 정보를 얻고, 이를 우리의 남자 친구에게 분명히 전달한 바 있다. 해서 도도녀를 유혹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고 꾸준한 노력을 해 온 그 이름 한백수는 일찌감치 화랑에 도착하여 회화의 세계에 푹 젖어 있던 터였다.
한백수는 일찍이 세계적인 화가, 즉 피카소니 고호니 레오나르드 다빈치니 사갈이니 하는 인물들에 대해 알게 모르게 많은 정보를 축적해 왔고, 그 이름이 나오면 그들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인물인가 하는 정도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렸고, 그들의 대표작도 한두 개는 외우고 있는 바였다. 국내적으로도 야시시한 김홍도니 드라마에서 여자로 나오는 신윤복이니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중섭이니 진짜니 가짜니 시끄러운 빨래터의 화가 박수근이니 색깔도 요란한 천경자니 등의 인물들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한백수가 손수 화랑을 찾아 가서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한 화가의 그림들을 찬찬히 감상하고 있음은 화가에게도 백화점 화랑에도 좋은 인상을 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문화적 식견으로 따져서 도도녀보다 한 수 위일 거로 보이는 한백수가 도도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진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겠다.
마침내 도도녀는, 화랑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존재의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한백수를 발견하였다. 처음엔 그 그림자의 주인, 중년남의 형태가 낯설진 않으면서도 차마 자신이 알고 있는 작자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도도녀가 알고 있는 사내 중에 화랑에 드나들 정도로 문화적인 식견이 높은 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 화랑에 세워 놓아서 조금이라도 화랑의 구조와 분위기와 어울리는 인물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깃집이나 호프집이나 모텔 베드에서는 그 형태가 그런대로 어울렸지만 문화라고 이름 붙은 것 앞에서는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백수, 이 자는 슈트까지 갖추고 조금씩 소리 없이 이동하면서 해시계처럼 달시계처럼 그림자를 시시각각 변화시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림 앞에서의 저 원천적인 고뇌, 침범할 수 없는 고독, 확장되는 사색의 아우라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리면서 한번 씩 격렬하게 뛰는 것이 아닌가? 사내라는 존재, 단독자의 무게감, 무심한 듯 보다 높은 차원을 겨냥하는 듯한 저 포즈. 도도녀는 무너지는 자신을 바로 세우며 어떤 그림 앞에 서 있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림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으면서 살아 움직이는 조형물, 검은 슈트의 사내에게 신경이 뻗쳐 있다. 도도녀는 이런 상태로도 어떤 느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만 황홀해졌다. (다음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