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신 여사가 일주일에 딱 한 번 머리를 감는 날이 돌아왔다. 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물세도 아깝고 수돗물도 꺼림칙하니, 최소한의 물로 감는 둥 마는 둥 하겠지만, 머리를 헹굴 때만큼은 삼0수 2리터짜리를 딱 반 사용할 것이다. 신 여사는 수돗물을 불신한다. 정수를 잘해 깨끗한 물이라고 아무리 강변해도, 신 여사는 ‘정순가 뭐 거시기 한다고 그 똥물이 어디 가야?’ 한다. 똥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을 바에 차라리 안 닦는 게 더 깨끗하다는 주장이다. 자식들이 몸에서 냄새 난다고 핀잔을 주면 “나! 냄새 안 나야.”라고 우기다가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 때, 육갑(六甲)을 볼 줄 아는 이가 나더러 한 말이 있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고독한 사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덕을 볼 생각을 말고 오직 스스로 힘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당시에는 안 듣느니 못한 찝찝한 점괘여서 그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 되도록 살아보니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특히 외로울 고(孤)는 나를 상징하는 붙박이 단어가 되어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나의 여가 활동 또한 고독한 팔자에 걸맞게 단독 산행으로 채워지고
백운대는 1992년 12월 첫 등정을 필두로 지금까지 300번 가까이 올라갔다. 특히 IMF 때까지 240번 이상 오른 걸 보면 가히 산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 무렵에 이곳은 그저 빨리 오르고 빨리 내려가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 심신 단련 장소였다. 사실 나는 몸뚱이가 하나만 있는 걸 원망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본업인 선생질을 하면서 적어도 일주일에 이삼 일은 남대문 동대문 새벽시장에 나가 옷 보따리를 지고 다녔다. 부업하는 아내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도 어떻게든 짬을 내어 매일 산을 찾았다. 특히 백운대는
네 꼬라지를 봐 염병하게 더운 날이었다. 원통사까지 땀으로 멱을 감으며 오른 다음, 산새 삼총사와 놀던 두쪽바위로 내려갔다. 땀으로 근수가 나가게 무거워진 웃옷과 젖은 손수건을 햇볕에 달궈진 바위 위에 널어놓았다. 아예 바지도 벗어 옆 자리에 두었다. 사람들 통행이 없는 곳이었기 망정이지, 달랑 속옷 한 장과 양말만 신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태양열로 이글거리는 숲을 내려다보았다. 큰 새나 작은 새나 더위에 지쳐 입을 벌리고 깔딱거리고 있을 판에 노래를 부르는 새들이 있다면 그게 비정상이었다. 나와 놀던
두견이 바로 알기 봄날 제주도에 들어가면 새소리들로 넘쳐났다.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휘파람새와 더불어 내 귓가를 떠나지 않고 항시 소리를 들려주는 새가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산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초성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연상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답답하고 찝찝했다. 나는 제주도 일정을 시작한 첫날부터 이놈의 새 이름 하나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드디어 알아냈다. 한심하게도 내 기억력은 무용
백운대 앵벌이 아주 오래 전이다. 그날도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북한산으로 달려갔다. 하지(夏至)가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저녁 시간이었지만 한낮처럼 밝았다. 백운대 꼭대기에 섰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800 고지인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더위는커녕 한기마저 느껴졌다. 정상 바위에서 내려서자마자, 나를 향해 급하게 달려오는 청설모 한 마리가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덩어리 산꼭대기에 웬 청설모? 처음에는 짐승들도 정신이 나갈 때가 있는가 보다 하면서, 흥미거리로만 보아 넘기려 했다. 그러나 내 발 바로 밑까지 온
그가 사는 아파트 침실 창에서는 텃밭과 시루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도 못 가릴 자그마한 시루봉이지만, 양 옆구리 뒤로 북한산, 도봉산 주봉들이 솟아 있어, 구도를 잘 잡은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한편 텃밭을 가운데 두고, 아파트, 시루봉, 애기단풍나무숲이 된 신사(神社) 터, 시루봉과 이어지는 능선이 동서남북으로 에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방향에서든 소리를 내면 공명현상을 일으키며 한층 크게 들렸다. 이를 잘 아는 그가 창가에 서서 휘파람을 불면, 워리와 순둥이는 낯익은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희
오늘도 순둥이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그의 발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새끼들이 눈을 뜨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미 순둥이 젖은 거의 다 말랐다. 순둥이는 흡착판처럼 달라붙어 안 떨어지려는 녀석들을 간신히 떼어내고, 작은 굴 밖으로 기어 나왔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언 채로 쌓여 있었다. 그가 갖다 놓았던 먹이 그릇은 진작 눈 속에 파묻혀 버려 보이지도 않았고, 초조한 순둥이가 서성거리며 남긴 발자국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북한산에서 미친 듯이 달려 내려온 칼바람이 바람결마다 톱날을 달고,
자주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바위가 있다. 기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양이라서, 내가 두쪽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 도봉산 원통사로 올라가는 인조목 계단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곳에 숨어 있어, 남을 의식하지 않고 느긋하게 산 아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나만의 쉼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사가 완만하기는 했지만, 편히 앉아 쉬기에는 영 망한 장소였다. 이 점이 두쪽바위의 옥에 티였다. 한 군데 오래 앉을라치면 엉덩이가 배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쓸리기까지 했다. 따라서 궁둥이를 이리 들썩 저리 들썩하며 옮겨 다녀야 하는
‘저… , 잠깐만요.’ 그 목소리를 들은 그 날 이후, 만경대 릿지와는 영영 굿바이였다. 백운대를 정점으로 찍는 북한산 트레킹이 심심해지면서, 보다 자극적이고 강한 산행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릿지(암릉 등반)와 암벽 등반에 눈길이 갔다. 암벽의 경우는 특수 장비도 필요하고, 단독 등반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아주 특별할 때만 시도했고, 주로 릿지화 한 켤레로 홀가분하게 다닐 수 있는 암릉 등반을 선호하게 되었다. 특히 만경대 릿지는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짧은 구간이라, 옆에 있는 백운대에 올랐다가
1. 한 여자 오늘도 목숨을 잃지 않고 용암봉 아래로 내려섰다. 백운대를 200번째 오르고, 곧바로 위문 옆 절벽을 타고 올라가 시작했던 만경대 릿지(암릉등반)가 끝난 것이다. 이대로 산성터 옆길을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용암문이 나온다. 나는 평소에 봐 두었던 바위 사이의 평지에 멈춰 섰다. 한 평이 채 안 되는 곳이었는데, 오른쪽으로는 노적봉이 마주 보이고, 왼쪽으로는 산성 주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었으며, 정면으로는 멀리 일산과 그 너머 한강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바위 타는 산꾼들 말고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린 걸 알고 난 후, 산에 내 몸을 맡기겠다는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한 산행이었다. 따라서 산은 병을 이기기 위한 체력단련장이고 극기 장소였다. 나는 다른 산으로 원정 갈 때나,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아주 특별한 날 빼고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북한산 도봉산을 올라갔다. 산은 나에게 정복과 승리의 대상이었다. 산 입구에 서면 승부욕이 서서히 피어났다. 그리고 앞만 보고 논스톱으로 치달았다. 앞에 누가 있으면 무조건 따라잡아야 했고,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파른 경삿길을 무섭게 치고 올라가 멀리 떨어뜨렸다.
북한산 국립공원 유감 2 – 사라지는 생명들 세월이 흐르면서 남아 주었으면 하는 것들까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나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삼십 년 이상 오르면서, 없던 길이 생기고, 계곡 형태가 바뀌는 걸 지켜봤다. 그러나 길과 계곡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자연 생태 질서까지 무너지고 있는 현상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환경 변화에 민감한 조류들만 살펴보더라도 많은 종들이 사라졌고 현재도 사라지는 중이다. 조류 말고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동물들의 모습이나 목소리들이 점차 뜸해지다가 아예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됐을 때
인간들이 무슨 권리로 자연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나, 쓸모 있어야 보호 받고 쓸모없으면 퇴출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들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쓸모없음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엇갈린 두 운명의 나무가 있다. 무수골 계곡 다래나무와 돌배나무가 그 주인공들이다. 도봉산 원통사에서 무수골 계곡을 내려가는 길 초입에 굵기가 어른 두 뼘 가까이 되는 튼실한 다래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국립공원 측에서 유해수종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말의 숙고도 없이 밑동을 잘라 버렸다. 물론 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