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이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75주년 기념사를 두고 악의적 비난을 쏟아내는 조선‧동아일보에게 일침을 가했다.시민행동은 광복절 행사에서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광복회장의 연설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이유에 대해 과거 감출 수 없는 친일 행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최악의 암흑기 우리 민중이 고통받는 순간에도 두 신문사는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앞장섰다고 설명했다. 그 예로 조선일보는 지원병 제도를 가르켜“내선일체
‘민생단’은 외적으로는 조선인 민생고 해결과 자치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조선인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고 조중협력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킬 목적으로 일제가 1930년 2월에 간도가 있는 동만주지역에 만든 친일반공적 성격의 단체였다.‘반민생단 투쟁’은 일제의 주구들이 동만주지역 동만특위와 항일유격구내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일제의 이간질과 모략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반민생단투쟁’은 초기에는 성공하여 일제의 모략책동을 완전히 무력화시켰고, 1932년7월 일제는 민생단을 사실상 해체시켰다.그러나 동만주 항일유격구내 반민생단투쟁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8월2일 오전 11시 구미시 임은동 왕산 허위선생 생가터 기념공원에서 구미 임은동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의 78주기 추모제를 열었다.이 단체는 지난해 중국 헤이룽장성 경안현의 희생기념비를 찾아가 고향에서 생산한 쌀과 술로 77주기 추모제를 올렸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중국 방문이 어려워 허 장군의 생가 바로 옆에서 추모제를 가지게 되었다.이날 추모제에는 허형식 장군의 조카인 허창수씨와 소설 '허형식 장군' 저자 박도 작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박사, 이육사 기념사업회 문해청 대표 등이 참석했다. 추모
7월10일 사망한 백선엽이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41년 “만주국 육군 봉천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고, 조선인 항일무장군 토벌 부대로 악명높았던 “간도특설대”의 만주국 헌병 중위로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수립이후 육군 정보국장과 국군1사단장 시절에는 여순항쟁 진압, 빨치산 토벌, 군내 좌익인사 숙군작업을 지휘하며 승승장구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3년 33세의 나이로 초대 육군대장이 되었다.백선엽의 이력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
“마춘걸 선생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 씨로부터 전화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분을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도와 준 첫 인연이었지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마춘걸 선생께서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일처럼 기뻤어요. 대한고려인협회 창립 이후 첫 쾌거였습니다.” 노 알렉산드르 회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려인 독립운동기념비’ 건립 문제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몹시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말 발음 역시 더욱 또렷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거의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방문을 전후로 광주광역시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이어졌다. 먼저 4월 10일부터 17일까지 광주시청 1층 로비에서는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전시회’가 개최됐다. 이어 4월 30일에는 광주 고려인마을에 '고려인 항일투쟁 역사유물전시관'이 개관됐다.시청에서 열린 행사에는 1904~1905 ‘고려인항일무장투쟁’, 1909 ‘고려인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19년 ‘연해주 3.1독립만세운동’, 1923~1935 ‘고려인 문화의 개화기’, 1937 ‘고려인 강제이주’, 193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