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공화국/김주선 도핑검사에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카페인은 선수들의 기분전환 차원을 넘어 실제로 경기에 도움을 준다는 보고가 있다. 국제반도핑기구에서 2004년에 카페인을 금지약물에서 제외했지만, 운동 전에 커피를 마신 사람이 운동 성과가 좋았다는 발표는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요즘 스포츠를 보다 보면 선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공되고 쉬는 틈틈이 물 마시듯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스포츠 트레이너에 따르면 심폐지구력을 향상하여 근육의 힘을 지속해 준다고 하니 안 마실 선수가 있겠는가. 내가 커피 맛을 안건 고3 때였다. 입시 공
쑥부쟁이 노인 / 김주선 김 노인의 직업은 침구사였다 . 신작로 곁 , 미루나무 아래에 납작 엎드린 집이 그의 침방이었다 . 잡초 같달까 , 신작로의 흙먼지가 앉아 초라한 그 집 뒤안길에는 노인처럼 괄시받던 쑥부쟁이가 무성했다 . 그이는 침술원이라는 목판 하나 내 걸지 않은 채 침 치료를 하거나 쑥을 캐러 다녔다 . 남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귀향했을까 궁금했던지 그의 새 아내를 보고 동네 아낙들이 수군댔다 . 제법 서울 물 먹은 티가 나는 중년 여인이 홀아비인 그를 따라 산골로 내려오다니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 누추했지만 용하
관광버스였는지 일반 시내 버스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비좁은 버스에 옹기종기 낑겨 앉아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떠났다. 첫 노래는 교가였다. 앞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뒷부분, 그러니까 후렴만 기억난다. “혜화, 혜화, 혜화, 하늘과 땅과 나라의 은혜로 우리는 변함이 없구한다.” ‘없구한다’가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없으련다’라는 뜻일 것이다. 김밥과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가지고(어떤 애들의 가방에는 바나나도 있었다) 학교 밖으로 멀리 나간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아이들은 자못 씩씩하게 노래했다. 교가보다 더욱 씩씩하게
이층 큰 방에는 체경이 달린 오래된 장롱들과 철제 침대 대여섯 개가 있었다. 일제 때는 사교댄스 교실이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 만큼 크고 넓은 방이었다. 장롱들 속에는 전쟁 때 납북된 할아버지의 양복과 모자와 가방과 안경 등의 유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벽을 따라서 배치되어 있는 침대들을 대학생이었던 외삼촌 두 분과 내가 하나 씩 쓰고도 몇 개가 남았다. 이층 큰 방에서는 골목을 지나가는 행상들의 노래가 잘 들렸다.“ 아지나 동태 ~ 도루묵……. 아지나 동태 ~ 도루묵…….”“ 다발무가 싸구려~ 다발파가 싸. 다발무가 싸구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밀려오라 최근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왼쪽 눈의 안압이 위험 수치로 높아 졌으니 이젠 술을 멀리 하라는 전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는다. 노력은 해 보겠다 하고 나왔다. 올려다본 하늘은 뒤지게 맑다.시큰하게 흐릿한 눈 속 초점이 안 맞는 술병을 보며 둘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나는 본디 술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비효율적인 것을 혐오했다. 굳이 돈을 들여가며 몸을 망치고 중독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 주량을 감당하지 못해 어불성설이 되는 꼴을 보면 우스웠다. 숙취에
기억의 세탁소- 마혜경 껍데기의 부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절실할 때가 있으니까요 당신은 오염됐나요 그림자와 얼룩 깊이에 따라 세제를 선택하세요 혐오도는 자동 측정되어 세탁 헹굼 과정을 거칩니다 아, 거기 목 뒤의 태그, 제거해주세요 어차피 무시 사항이니까 보관할 기억은 따로 다운로든하는 거 아시죠 기억 분실은 슬픔을 남기죠 이건 팁인데 악몽은 그냥 두세요 한결 가볍죠 당신은 편두통이 있나요 보통 강함 매우강함 중 원하는 탈수를 표시하세요 대개 강함이 무난하지만 내일 데이트가 있다면 보통을 추천합니다 촉촉함은 저희만의 장점이죠 참,
국도를 달리던 군용 지프가 있었다. 길가에 있던 아이들 중에 하나가 갑자기 국도로 뛰어들었다. 운전병은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 아이는 머리통이 터져서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지서 순경이 마침 현장에 있었다. 지서 순경은 의식을 잃고 피를 철철 흘리는 아이를 안고 길가의 병원에 뛰어 들어갔다. 병원의 의사는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침착하게 수술대 위에 누이고 퉁퉁 부어오른 아이의 얼굴과 머리를 알코올을 적신 거즈로 씻겨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이 점점 드러났다. 의사는 아이를 알아보고 집안에다 고함을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들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눈곱이 말라붙어 속눈썹들로 눈을 꿰매 놓은 것 같았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질러서 간신히 눈꺼풀을 벌렸다. 커튼 한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비좁은 방이었다. 일어나고 싶어서 눅눅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젖혔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편두통을 앓았을 때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목이 타고, 아랫입술 안쪽이 쓰라렸다. 개를 쫒기 위해 휘두르던 허리띠가 내 입술을 스친 기억이 났다. 이불 속에서 배를 더듬었다. 여권과 달러가 든 전대는
성명: 박인생년월일: 1980년 5월 20일주소: 지구 행성 북위 36.7도 동경 127도진단명: 중력 기원성 두통상기인은 남성 신규환자로 금일 진료시 원인불명 두통을 호소하였다. 그가 처음 진료실에 들어설 때 그의 목은 바로 선 자세에서 열두 시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병력 청취와 진찰을 통하여 경추 기원성 두통으로 진단하였다. 경추는 목등뼈로 일곱 개가 있고 주요 신경은 여덟 개이다. 통증은 주로 척수에서 나오는 여덟 개 주요 신경과 갈라진 작은 신경 주변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두통의 원인은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