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왠지 방학동에 갈때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그 동네를 걸으며 맞는 비는 평온하지만 왠지 모르게 애잔하다. 근심이 없다는 뜻의 무수(無愁)골이 에워싸면서 세상의 모든 소리와 근심을 살펴본다는 관세음보살의 다른 호칭인 원통(圓通)에서 이름을 딴 방학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원통사를 찍고 내려오면 연산군의 묘가 쓸쓸히 자리를 잡고 있는 그곳, 거기에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시인이었던 김수영을 기리는 문학관에 며칠을 벼르고 다녀온 그날도 겨울비가 내렸다.코로나 3차 대유행으로 한달여를 휴장했던 김수영문학관이 거리두기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 때, 육갑(六甲)을 볼 줄 아는 이가 나더러 한 말이 있었다. 한 마디로 딱 잘라 고독한 사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도 덕을 볼 생각을 말고 오직 스스로 힘으로 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당시에는 안 듣느니 못한 찝찝한 점괘여서 그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이 되도록 살아보니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특히 외로울 고(孤)는 나를 상징하는 붙박이 단어가 되어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나의 여가 활동 또한 고독한 팔자에 걸맞게 단독 산행으로 채워지고
네 꼬라지를 봐 염병하게 더운 날이었다. 원통사까지 땀으로 멱을 감으며 오른 다음, 산새 삼총사와 놀던 두쪽바위로 내려갔다. 땀으로 근수가 나가게 무거워진 웃옷과 젖은 손수건을 햇볕에 달궈진 바위 위에 널어놓았다. 아예 바지도 벗어 옆 자리에 두었다. 사람들 통행이 없는 곳이었기 망정이지, 달랑 속옷 한 장과 양말만 신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태양열로 이글거리는 숲을 내려다보았다. 큰 새나 작은 새나 더위에 지쳐 입을 벌리고 깔딱거리고 있을 판에 노래를 부르는 새들이 있다면 그게 비정상이었다. 나와 놀던
자주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바위가 있다. 기다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누워 있는 모양이라서, 내가 두쪽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 도봉산 원통사로 올라가는 인조목 계단으로부터 살짝 벗어난 곳에 숨어 있어, 남을 의식하지 않고 느긋하게 산 아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나만의 쉼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사가 완만하기는 했지만, 편히 앉아 쉬기에는 영 망한 장소였다. 이 점이 두쪽바위의 옥에 티였다. 한 군데 오래 앉을라치면 엉덩이가 배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쓸리기까지 했다. 따라서 궁둥이를 이리 들썩 저리 들썩하며 옮겨 다녀야 하는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린 걸 알고 난 후, 산에 내 몸을 맡기겠다는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한 산행이었다. 따라서 산은 병을 이기기 위한 체력단련장이고 극기 장소였다. 나는 다른 산으로 원정 갈 때나,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아주 특별한 날 빼고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북한산 도봉산을 올라갔다. 산은 나에게 정복과 승리의 대상이었다. 산 입구에 서면 승부욕이 서서히 피어났다. 그리고 앞만 보고 논스톱으로 치달았다. 앞에 누가 있으면 무조건 따라잡아야 했고,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파른 경삿길을 무섭게 치고 올라가 멀리 떨어뜨렸다.
인간들이 무슨 권리로 자연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나, 쓸모 있어야 보호 받고 쓸모없으면 퇴출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들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쓸모없음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엇갈린 두 운명의 나무가 있다. 무수골 계곡 다래나무와 돌배나무가 그 주인공들이다. 도봉산 원통사에서 무수골 계곡을 내려가는 길 초입에 굵기가 어른 두 뼘 가까이 되는 튼실한 다래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국립공원 측에서 유해수종을 제거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말의 숙고도 없이 밑동을 잘라 버렸다. 물론 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