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식성의 여자를 좋아하나요 왕년의 영화배우 장화자는 역시 왕년의 동영상제작자 즉 감독과 블루호텔에서 나와 호텔 뒤 음식점 골목으로 접어 들어갔다. 장화자는 호텔 로비에 있으나 호텔 뒷골목에 있으나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여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둘의 이 기묘한 조합에 대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번씩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우월한 미모의 여자와 왜소하고 추레해 보이는 남자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 그들 눈에는 불균형으로 보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에는 남자가 돈깨나 있나, 아직 팔리지 않은 부동산이 있나, 복권에 당
나한테 어느 정도 돈을 쓸 건데? 40대의 동영상제작자는 여자 종업원을 불러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여배우 미나는, 우리의 감독이 예전에 손수 계산한 적도 드물었지만 계산할 땐 주로 현금을 사용한 걸 기억해냈다. 아마도 카드조차 발급받지 못하는 신용 9등급인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 떡하니 카드를 꺼내, 보기에도 일반 카드가 아닌 금빛 나는 프리미엄처럼 보이는 카드를 꺼내 손수 계산하기 번거롭다는 듯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결제해오라고만 하니 웬만한 자신감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미나는 종업원이 성이 난 표정으로
배치기로 들어오면 배치기로 돌려주마 내가 희망이요, 그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 털투성이 팔이 희망이라고 속삭이고 있는 40대 동영상제작자의 팔을 미나 양은 조용히 들어 원위치에 내려놓았다. 걸친다고 내버려두면 그게 사내를 만족시키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가벼운 거절, 거부하는 몸짓, 그런 모습이야 말로 남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모습이요, 애타게 하는 모습이요, 그 모습을 다른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 지향시켜야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연인지 뭔지 하나 주겠다고, 내 말만 잘 들으면 새 영화의 배역 하나
최후의 만찬을 하는 건가요 몸매 되고 끼 있고 재능도 있지만 아직 뜨지를 못한 여배우 민아는 40대의 동영상제작자 즉 영화감독이란 자가 내일 자살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감독이 이러한 고급 일식당에서 이 정도의 음식을 누구에게건 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살을 앞두고 주머니를 털어 비싼 음식을 드시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민아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자살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는 건 지나친 추측이었다. 신문이나 방송 또는 선정적인 주간지에서조차 자살을
사 준 만큼만 가져라 여배우 민아는 동영상제작자 즉 영화감독이라고 부르는 남자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여자들끼리는 스파게티니 피자니 하여튼 서양음식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있을 리 없지만, 남자들이 그러한 데 가는 걸 본 적이 없으므로 그런 음식에 대한 기대일랑 접고 뼈다귀 해장국이나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잠깐 눈을 의심한 것이, 감독은 간판도 세련된 일식집으로 향한 것이다. 이러한 일식집은 동네 어귀에 있는 동해수산이니 싱싱해산이니 그러한, 커다란 유리창 안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가 있고 밖의 수족관에는 광어
스타가 되기 전에 엮어두는 게 필요해 복권 1등 당첨 후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갖은 상상을 다하고 있는 우리의 40대 동영상제작자 남자는 마침내 `미나`라는 신인 여배우와 저녁약속을 잡는 데까지 이르렀고, 이제 그녀를 만나러 약속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하철 3번 출구라든가 엘지 편의점 앞이라든가 우리은행 정문 앞에서 보자는 등 그러한 약속은 사내들끼리 즉 만나자마자 한 잔 하러 가야 하는, 촌각을 다투는 사내들끼리, 혹은 찻값따위 아깝게 왜 낭비하느냐고 생각하는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끼리나 하는 것으로, 아무래도 예의를 지키거
신분이 바뀌었다 해서 대기업 상무였다가 재산을 모두 날리고 대리기사가 되어 묵묵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사내는 한 주에 연금복권 두 장을 사서 소중히 안주머니에 모셔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긁어대는 즉석복권의 가벼움에 대해 그는 비교적 회의적이었다. 복권은 기다리는 맛이 있어야 참다운 맛을 느낀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100원짜리 동전을 세워 긁어대며 숫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다지 멋져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긁어 부스럼이라고 부스러기
서울의 밤에 이렇게 해서 도시의 하루는 저물고 있다. 대기업 상무였던 자가 대리기사가 되어 모는 BMW의 뒷좌석에는 40대의 동영상 제작자와 사진모델 고대해가 나란히 타고 있고 차창밖에는 도시의 어둠이 깔리고 있다. 어둠이 깔릴수록 불빛들도 살아나 낮에는 가려져 있던 대도시의 숨은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아니 부유하고 있다. 돈냄새, 분냄새, 거래의 냄새, 욕정과 배신의 냄새 등이 거리를 부유한다. 아무도 단란한 가정 같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아무도 믿음과 우정 같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 범죄와 한탕 같은 얘기들이
먹물냄새 나는 대리기사의 사연은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그저 어느 신문이나 어느 잡지나 어느 방송이나 어느 포털이나, 보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눈에 띄는 - 그렇다고 보려고 하면 정작 잘 보이지 않는 - 그저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에 동정심을 가지면서도, 그렇게 살고도 불행해지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이중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이다. 행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식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엔딩 이후에 자기들끼리 해야 하는 것이지 관중들에게 대놓고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건 큰 결례인 것이다. 해서 우리
와인 바 ‘달빛 소나타’에서의 시간도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샹송을 부르는 작은 무대가 있고, 은은한 조명이 깔린 실내와 와인이 있는 나무 탁자가 있었다. 이 자리는 탁자를 사이로 두 남녀가, 그것도 묵은 관계가 아닌 갓 만난 30대 여성과 40대 초반 남성이 있는 결코 예사 자리가 아니었다. 실로 인생에 이런 자리가 많은 건 아니었다. 물론 동영상 제작자의 경우 뻔질나게 많은 만남과 작업과 결실들이 있어왔지만, 그것들이 모두 오늘과 같은 흥분과 기대감과 설렘과 안타까움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상대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로맨스에 이어 리얼리즘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로맨스는 리얼리즘과 만나야 한다고 정의를 내림으로써 둘 사이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는 성인남녀라면 깊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아직 이십대 초의 풋풋한 청춘들에겐 크게 어필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었다. 20대라면 당연히 사랑은 죽고 못 사는 것으로, 사랑을 위해 부모 국경 환경은 물론이고 한 목숨 바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과감히 선언함으로써 절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