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잘 마른 나무는 듣기에도 맑은 소리를 내며 탄다.타닥 타다닥 마치 콩 볶는 소리 같기도 하다.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영혼이 춤을 추고 있는듯 하기도 하고그 화려함에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이 일기도 한다. 어제 밤열 두시 뉴스 속보가 나왔다.이태원 골목에서 커다란 압사사고가 일어났고 사상자가 엄청나단다. 오늘 아침150명, 오후 153명이게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난 것이냐.분노에 일손이 잡히질 않는다.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촌 선진국이라는 내 나라에서...마른 나무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목숨을 잃은 젊은 영혼들에게 슬픔에 겨운
낮달과 국향 뜨거운 여름 햇볕을 듬뿍 담았다가햇기 식으면 해 닮은 노란 꽃대를 올린다.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으면오래된 그리운 향이 난다.시리도록 푸른 하늘에낮달이 국향처럼 그윽하다. 어릴 적 넉넉찮은 집안 형편으로학업을 잇지 못하고 객지에 나가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많이 보고 싶었다.매년 꽃대를 올리는 자그마한 감국을 보면그시절 그리던 누님이 떠오른다. 낮달은 애잔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국향에 어우러지면아련한 그리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 낮달과 국화를 만났으니참 호사스런 하루가 되었다.
구절초 하얀 날개가 동그란 모양으로노란 꽃들을 감싸고 있어요. 햐얀 날개는 노란 꽃에게벌이며 나비를 부르는 도우미 가꽃 중양절에 수줍은 꽃 활짝 피우는아홉 마디 구절초 어머니 사랑을 담고 있는구절초가 지면 가을도 간다는 꽃 깊어가는 가을날에어머니께서는 구절초 전채를 채취해 오셨고가마솥에 푹 과서 환을 지으셨지요. 구절초 환은 누나들에게만 먹게 하셨고나이 들어 알게 된 사실은그 환은 여자들에게 약효가 크다는 것을요. 그래서 꽃말이 어머니 사랑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노래는 점점 잊혀져 아득한 옛날이다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끝나지 않은 전쟁터에서가슴졸이며 살고 있는 겨레한 때 떨리는 설레임으로 밤을 지새운 날도 있었고통일이 이뤄질 것 같은 기대에 들떠몇 그루의 나무를 심기도 했다갈라진 민족의 뼈아픈 역사부끄러운 역사 청산하는 나무 빈 땅에 심었다평화의 나무통일의 나무번영의 나무희망의 나무정성껏 심었다골육상잔의 불행한 시간 복수 적개심 불타는 응어리눈녹듯 녹아도 시원치 않을 시간8천만 겨레 가슴마다 날이 갈수록 시커먼 숯
용각산 아프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누군가는 아파도 사랑하고누군가는 사랑하며 아프고... 당신께서는 기침의 속이 그리도 깊은데늘 곰방대를 잡으셨다.어머니는 늘 성화셨고 예순이 훌쩍 넘긴 나도기침을 하면서 권련을 들고 있다.평행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나는 감기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침을 한다. 몸에 좋지 않은 담배는 아버지 평생의 사랑이셨다.객지에 나간 큰 누나는 용각산을 끊기지 않게 뒤를 댔다.깊은 기침에도 당신의 담배연기는 피어올랐다.아마도 기침과 담배는 당신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며 아파하고아파하면서도 어쩔 수 없
낙엽 2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스스로 제 한 몸 비우기란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아무것도 아닌 양 바람 부는 대로 뒹구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비 오면 비 맞고 밟으면 밟히는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이 모든 것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 낸단 말이냐?
낙엽 1 운명이다.애당초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쓸쓸함이 떨어지고 고독이 밟힌다.나는 낙엽을 밟고 있다. 가을 떨어진 자리에는또 다른 운명이 기다린다.낙엽을 밟고 있는 나는겨울로 가는 시간에몸을 맡길 뿐이다.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깊어 가는 가을밤에는교교히 내리는 달빛이 제격이다.나는 달빛 아래에서가을에서 겨울로 걸어가고 있다.
계절따라 참 많은 꽃들이 핀다봄꽃은 아기 웃음처럼 화사하게 피고여름꽃은 젊은이처럼 정열적으로 피고가을꽃은 곱게 늙은 사람처럼 핀다풀밭 사이사이 얼굴 내밀고 환하게 웃는 꽃돌틈 사이를 비집고 가냘프게 흔들리는 꽃모든 꽃에는 향기가 있다세상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참 많다꽃의 향기는 일주일 가기 어렵지만사람의 향기는 천년도 간다 간혹 꽃보다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돈의 노예로 살아간다갈등하고 분노하고 속이고 집착하고 채우려고만 한다지독한 이기주의에 물들어 나만 알고
1부 모개(木瓜) 시절 5보리밭고랑 깜부기 훑치랴냇갈에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으랴거무튀튀한 사촌형들여자 냄새 역한 사촌누이동생나는 끼니 때마다 빨리 먹고 자리를 뜨려고추장 한 가지로만 후딱 비벼먹기 일쑤였다작은집에 내 별명은 고추장 벌거지가 됐다―어머니는 두고두고 이 별명을 가장 가슴아파하셨지어머니와 식구들이 그립고도 야속했다심지어 밤마다 악을 쓰며 울던 모개와감꼭지니 개떡을 놓고 다투던 작은누이까지도엄청 보고 싶었다 내 벗은분교 마당 한 켠 둥구나무 한 그루였다사촌형을 피해, 그 나무에 기대면이른 잘새들 왈치고무엇보다 멀리 해거름
1부 모개(木瓜) 시절 4그때 나 또한영동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일학년을 다녔는데어느 날 어머니 손에 이끌려상주 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먼 고모네가 거기 살았을 게다그러나 한 달도 채 안 돼다시 영동국민학교로, 그것도 처음 반으로전학을 되돌아왔다선생님과 애들 앞에창피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고내 손을 꽉 거머쥔어머니 손이 싫었다온통 트고 갈라져 겨울이고 여름이고소나무 껍데기처럼 꺼끌꺼끌한 손가자 이눔아,어머니는 또 한번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이번에는 작은아버지 댁이었다사방이 산으로 꽉 막힌두메 분교 마을이었다썩은새 추녀, 돼지울 마당,
1부 모개(木瓜) 시절 3아무튼 왜, 가난한 시절집집마다 모개가 한 명씩은 있잖냐이런 모개들은 어렸을 때부터식구들이 겪는 고생 옴팍 다 뒤집어썼다식구들이 한데 살기가 어려워여기저기 흩어지다 보면 한둘쯤누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됐는지도무지 알 바 없었다어렸을 적 밤하늘 뭇별을 올려다볼 때마다흩어진 식구, 모개 생각에 가슴 애리곤모개(木瓜)할퀴고멍들고툭 튀어나온 마빡아무도 닮지 않아허구한 날 골목 구석쟁이에 꾸물꾸물감꼭지 사과껍데기 주워 먹어이수교 굴다리 밑주워왔단 모개야탑삭부리 아버지만이품에 꼬옥 끌어안고이 세상에 가장 이쁘다두만내
1부 모개(木瓜) 시절 2마침내 어머니는검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까지 잘라서 팔았다백수가 된 아버지는 들앉아형 누이들이 담배꽁초를 주워 오면그거나 피우면서 시간을 겪었다두 분은 걸핏하면 다퉜는데아버지는 휘딱 집을 나가한 달이고 두 달이고 반 년이고소식이 없을 때도 많았다이스라치더두덜도 아닌꼭 어제만큼 떨어졌네양재기에 한 홉큼빨간 알갱이들꼭두새벽 이슬 머금어좀 시금털털하제?아버지 외입 가 돌아오지 않는된 밤파랗게 걷히고
『내 삶은 시』나도서관 갔다 오는 사람처럼벌 버섯 치는 사람처럼촛불 나가는 사람처럼아, 씨뱅이 모자에 똥배낭 하나 걸머메곤1부 모개(木瓜) 시절 1우리는 결딴이 났다심천, 조동, 용산, 황간 이런 데서산골 국민학교 선생으로 떠돌던 아버지가선생 노릇 때려치곤 무턱대고 산판에 손을 댔는데바로 망하고 말았다어머닌 남의 집 식모를 나가고형은 다니던 고등학교를 관두자트럭 조수로 나갔다열네댓 살 앳된 소녀 누이는 영동 역전에 나가광주리 머리에 이고사과니 조기 따위를 팔았다허구한 날 모개는악을, 악을 쓰며 울었다어머니는 젖을 떼려 젖망울에 쓴
가을 색 가을은 바람으로 다가온다.습기 잔뜩 머금은 고온의 바람이어느새 물기를 죄다 말려 버리고온도를 낮춘 채 그것도 조용히 불어 온다. 가을은 풍요로 다가온다.오곡백과가 익어가고토실토실 과실에 살이 오른다.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함이다. 가을은 볕으로 다가온다.우중충했던 햇살이 습기 떨구고따끈한 볕으로 내리쬔다.따끈한 볕 줄기는 가을 색을 만든다. 가을은 색으로 다가온다.빛 고운 한복의 파스텔톤 색 같은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고만산엔 황엽과 홍엽이 수 놓는다. 가을은 추억을 적시는 계절이다.햇살에 눈 부신 노오란 은행잎처럼아름다
어둡고 소란스럽다아비규환의 땅 속시기 질투 증오가 난무하여 갈등이 증폭된다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꼼수가 넘친다너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살지 못하는 악의 경쟁이 휘몰아친다네가 잘하면 박수쳐주고 나는 그보다 더 잘하겠다는 선의의 경쟁은 온데간데 없다봄장마가 엄습할 때는 썩어 문드러지면 어쩌나 걱정했다폭염의 나날로 여름가뭄이 이어질 때는 말라죽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했다이어진 폭우 속에서는 통째로 떠내려가지 않을까 조마조마 가슴 쓸어내렸다땅 위의 시련도 시련이지만 땅 속에선 더 많은 아귀다툼이 벌어졌다두더쥐가 뿌리를 관통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나 1950년 9월 25일 사망 추정한다. 한의사 연일 정 씨 정태국, 어머니 하동 정 씨 정미하의 4대 독자다.연못 용이 하늘로 오르는 태몽이라 아명을 지룡으로 하고 한자가 다른 지용을 이름으로 했다. 이름 지용에서 지는 영지 지도 되며 이름을 귀히 여겨 관례 후 대신 부르는 자도 영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천주교에 입문해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다.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때 요람지 발행에 참여했다.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한다. 그의 시 향수
능이 냄새는 추억이다. 세상의 내가 경험한 모든 냄새는내 삶의 궤적과 함께한다. 하나뿐인 여동생이오래비 먹으라고 능이랑 송이 몇 송이를 보내왔다.그 귀한 것을... 능이 향이 그윽하다.코를 한번 벌름거리면아버지 냄새가 난다.퀘퀘하면서도 정겨운 그리움 또 한 번 벌름거리면어릴 적 초가집 윗목에 있는네모난 궤짝 냄새가 난다.기억할 수 없이 오래된엄마 손때 묻은엄마 품안의 젖 냄새 같은 아련함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그리움에 젖은 냄새를 맡는 일이다.그 안에 네가 있고 내가 있다. 냄새는 추억으로 만드는 역사다.
민초 별 볼 일 없을 것 같지만대단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람이지만아무것인 훅하면 금방 날아갈 것 같지만질긴 함부로 밟으면 사라질 것 같지만되살아 나는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절대 조심해야 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역사를 만들어 가는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개××하면 안되는 민초는 그런 분들입니다.
가을 하늘 유난히 푸르른 가을 하늘을 봅니다.해님이 남쪽에 있으면 북쪽 하늘을 보세요.북녘 하늘이 더욱 푸르러 보입니다.그쪽 사람들도 이 푸른 하늘을 보고 있겠지요. 유난히 푸르른 가을 하늘가에 유난히 하얀 구름이 흐릅니다.구름 속에는 동화 속 이야기가 가득 할 것 같습니다.하얀 구름을 타면 저쪽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듯 시간도 흐릅니다.유난히 푸르렀던 하늘이유난히 하얗던 구름이유난히 붉은 빛을 띱니다.황혼이 펼쳐진 하늘에 마음을 담아봅니다.그토록 그리워한 긴 시간이 담긴 노을에편지 몇 자 써봅니다. 우
우리 말 오순도순의좋게 서로 이야기하거나 지내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너랑 단둘이 오순도순 살고 싶어. 도란도란나직한 목소리로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오순도순 살면서 서로의 말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면 좋겠어. 소곤소곤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이야기하는 소리남들이 들으면 안되는 말은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소복소복담기거나 쌓여 있는 것들이 볼록하게 많은 모양을 나타내는 말그렇게 지낸다면 우리의 사랑도 소복소복 쌓이겠지. 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