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질링산비탈 도로는 운무에 잠겨 있었다. 버스가 산굽이를 하나씩 돌 때마다 운무는 점점 짙어져서 눈앞의 길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운전사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깜박 깜빡 잠들다 깨곤 했다. 한 번 씩 잠에서 깰 때마다 운무는 더욱 짙어졌다. 버스의 노란 전조등이 휘젓는 푸른 운무 속에서 우중충한 집들이 나타났다. 칙칙한 색깔의 두꺼운 옷을 입은 야윈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다가는 다시 운무만 보였다.눈을 감으면, 수 십 년 전 다도해 뱃길이 출렁출렁 다가오기도 했다.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보였던 하얀 바다, 저 멀리
다들 그랬듯이 나도 고향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그런데 나는 고향이 어디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한 달도 안 되어서 양구 땅으로 갔다가 돌 전에 포천 땅에 와서 자랐고, 열 살이 안 되어 서울로 유학을 가서 친척집과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서울은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정든 바 없고, 양구 땅은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으로 기억을 대신하고 있다. 포천 땅 또한 어릴 때 자란 곳이기는 하지만 스산한 기억들만 스치곤 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피난민
삼 년 넘게 춘천의 한 아파트에 살면서 꿈꾸던 일 중 하나는 산기슭에서 옹달샘 물을 먹으며 사는 거였다. 그리고 텃밭에 푸성귀를 가꾸는 거였다. 푸성귀 중에서도 대파를 꼭 심어보고 싶었다.봄에 봉의산 언저리를 걷다가 본 허름한 집 텃밭에 핀 대파 꽃이 소담스러웠다. 환한 햇살이 퍼지는 텃밭에 자라는 몇 무더기의 대파 꼭대기에 하얗게 핀 동그란 꽃 대궁은 모든 채소 중에서 대파가 가장 높은 벼슬을 하는 채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재개발 공고 판이 서 있는 동네였다. 빈 집도 많았다. 그 중 어느 한 집에는 작은 우물도 있었다. 한 때는
라면 값도 모르는 간첩용의자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머리 뒤에 대고 앞서서 걷고, 예비군들은 총부리를 겨눈 채 바짝 따라 붙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구경꺼리인가? 개구쟁이들이 신났다. 아이들 몇은 눈을 뭉쳐서 간첩용의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짓궂은 놈 몇은 눈 위에서 개똥을 주워 던지기도 했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눈을 부라린 젊은 예비군이 있어서 더 이상 침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오는 구경꾼들은 저동항에서 더 늘었다. 간첩 용의자를 앞세운 예비군들과 숙덕거리는 구경꾼들이 이룬 이 기묘한 대열은 도동항으로 넘어가는
참혹한 모습의 사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선창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 녹는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닷가로 쭉 이어지다가 산 쪽으로 굽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 세워진 팻말들을 보았다. 한 팻말에는 '일몰 이후 해안에 접근하면 발포함‘ 이라고 적혀 있었고 또 다른 팻말에는 '간첩이나 간첩선을 신고하면 받을 수 있는 포상금이 최고 ****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귀로에는 일몰 전에 해안을 통과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산 쪽으로 이어진 길 끝의 마을이 궁금하여 더 걸어 보기로 했다
육지에서 배가 들어온 다음날 아침은 새파랗게 갠 하늘을 보여 주었다. 새하얀 구름은 어린 강아지들처럼 몽실몽실하고 귀여웠다. 바다도 언제 그렇게 사나웠냐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려 1주일 동안 겪은 섬의 악천후와 고독에 질려 있었다. 미소 짓는 바다에 홀려 며칠 더 머물다가 다시 악천후를 만나 갇히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선창에 내려가서 다음날 떠나는 배표를 끊었다. 출항할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22시간. 하얀 강아지 구름들은 이제 저동항 쪽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도동항이라도
따스하게 느껴지는 집어등 불빛이 무대의 조명처럼 선창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찢어질 듯 펄럭이는 어선의 깃발들, 육지에서 오는 선객들을 마중 나온 동네 사람들이 반가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겨우 1주일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니 가슴이 따듯해졌다. 딱히 기다릴 사람도 없었던 내가 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창에 나갔던 것은 무료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어등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친숙하게 느껴졌다. 울릉
당시 공병대대 정문 위병은 1 중대 상병이었다. 상병은 저 먼데서 누가 악을 쓰면서 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위병조장인 하사에게 보고를 했다. 하사는 위병 장교인 소위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악을 쓰면서 달려온 자가 본부 중대 병장임을 확인하고 정문을 통과하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 위병 장교였던 1중대 신임 소위가 누구냐고 묻기는 했지만 '본부중대 말년 병장'이라고 했더니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다.내무반 불침번에 의하면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옷을 활활 벗어던지면서 뻬치카 옆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더니 덜덜덜 떨면서 군화를
숨을 좀 고르고 나니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귀신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그 위위위위잉 하는 소리는 내 머리 위 아득한 곳에 길게 이어진 고압선을 스치는 바람 소리였다. 초생달이었을까, 그믐달이었을까. 어쨌든 찢어질 듯이 웃는 냉혹한 마귀의 입 같은 달이 하늘에 있었다. 그 달은 나를 놀리고, 바람 소리는 겁을 주는 하늘 밑에서 이 인간은 개 떨듯 와들와들 떨었다.눈앞에 여울물이 소리 내며 흐르고 있었다. 여울 위쪽에는 얇은 얼음이 보였다. 얇은 얼음보다 상류에는 두꺼운 얼음, 즉 이 인간이 살아보려고 박치기를 해대던 얼음
병장이 되자 간이 커져서 일석점호를 마치면 혼자 궁평리 마을 가게에 나가서 전화도 하고 호빵도 사먹고 소주를 마시면서 부대로 돌아온 일이 몇 번 있었다. 신통한 안주도 없이, 걸으면서 병째 들고 급히 마신 술이어서 아우라지 다리가 저 밑에 보일 때쯤이면 취기가 올랐다.고요한 밤에 혼자 아우라지 다리를 건너자면 다리 바로 밑으로 큰물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무섭기도 했다. 나는 동행이 있기나 한 듯이 큰 소리로 이 새끼 저 새끼 욕도 하고 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아우라지 다리 중간에 하류 쪽을 보고
아우라지 다리는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궁평리와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사이의 한탄강에 놓여 있다. 잠수교이다. 오늘 네이버 지도를 검색해 보니 아우라지로 접근하는 도로는 있는데 거기에 놓였던 잠수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1킬로미터 하류에 궁신교라는 새로 생긴 교량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아우라지 다리는 영원히 잠수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지도에서 궁신교는 우리가 자살 바위라고 불렀던 큰 바위 근처에서 강 건너 신답리 공병대대 쪽으로 이어져 있다. 네이버 지도에는 자살 바위도 나오지 않는 대신 그 근처에 '리버사이드 모텔'이 표
전쟁 나던 해에 어머니는 함흥시 제 11 인민학교에서 갓 교생을 마친 앳된 처녀 교사였다. 어머니는 언니와 함께 소문난 미인이었다. 어머니의 언니는 이미 결혼하여 자녀를 다섯이나 두었는데도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버들 미인’이라 불렸고, 어머니는 두 눈이 초롱초롱하여 ‘샛별 미인’이라 불렸다. 어느 날 교육청에서 장학사가 어머니를 호출했다. 장학사는 총각이었으며 공산당 당원이었는데, 어머니에게 공산당 입당을 권유하면서 자신이 추천해 주면 입당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학교에 돌아와 교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
박 씨는 지나간 전쟁 중에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비무장 지대인 철원 북쪽 어느 마을에서 자랐다. 전쟁 나던 해 봄에 인민학교 2학년이었는데 나물하러 가는 형들을 따라 산에 갔다. 그 날 산에서 버섯을 따 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 뒤 몇 달 동안은 기억이 없다. 그가 먹은 버섯은 미치광이 버섯이라고 부르는 독버섯이었다. 이 걸 먹은 사람은 낄낄거리며 사방천지를 돌아다니는 광인이 된다고 했다. 그도 그렇게 실성하여 낄낄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피난민 대열에 휩쓸려 이남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남쪽 어느
비 오는 날이면 덕재 고개의 주막은 낮부터 손님이 모였다. 나도 가끔 한 귀퉁이 차지하고 앉아 막걸리를 마셨는데, 혼자라 심심하기도 했고, 호기심이 많던 때라 주막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패는 석수들이었다. 그들은 고개 마루 부근에 흩어진 화강암 바위들을 쪼아서 축대용 견치석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석재 채취 허가를 내고 석수들을 고용한 사람은 고개 동쪽 면 소재지의 양조장 주인이었다. 그는 석수들이 규격에 맞추어 쪼아낸 견치석 개수에 따라서 전표로 사들였다. 석수들은 그 전표를 모았다가 양조장
대규모 기동훈련이 여러 날 계속되던 어느 날 비가 몹시 내렸다. 사격장 출입은 통제 되어 있었고 소들은 목장 옆에 조성한 목초 밭에 풀었기에 목동 두 사람이 각각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과 사격장 넘어가는 길목을 지켰다. 나는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소들을 지켰다. 판초 우의를 걸치고 바위 처마 밑에 혼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노라니 무료한 가운데 처량한 생각도 들었다. 소들은 찬비 맞는 등에 더운 김을 피워 올리며 열심히 풀을 뜯었다. 빗소리와 도랑을 흐르며 모래를 굴리는 물소리 속에서 이따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
대규모 기동훈련에는 비행기 뿐 아니라 자주포나 탱크 또는 장갑차까지 왔다. 또한 포병들과 보병들이 따라 왔다. 그들은 덕재 고개 남쪽에 진을 쳤다. 그들 병력들이 진을 치기도 전에 무슨 레지스탕스나 첩보원처럼 나타나는 민간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미군 헌병들은 이들이 진지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모포부대라 불리는 사람들을 철저히 단속했다. 모포 부대는 남녀혼성조직이었다. 보통 여자 한두 명에 남자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자는 미군들에게 대마초나 환각제를 팔
치누크가 사격장에 날아온 날이 생각난다. 치누크는 프로펠러가 앞뒤로 두 개나 달린 헬리콥터다. 커다란 트럭이나 장갑차도 쇠줄로 매달고 날아다닌다. 그 날의 치누크는 앰뷸런스를 매달고 날아왔다. 흰 바탕의 원 안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적십자 마크도 선명한 앰뷸런스였다. 치누크는 그 앰뷸런스를 여러 민둥산들 중에서 제일 왼쪽 민둥산 꼭대기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우리는 그 때 소를 풀어 놓고 쉬면서 치누크가 하는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우리는 앰뷸런스가 거기 놓인 이유에 대해서 제각기 다른 주장을 폈으나 사격 연습의 타깃일
우리가 점심을 먹는 장소는 대체로 세 군데 쯤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소들을 몰아넣기 좋은 억새밭 기슭의 샘가였다. 새벽밥을 먹고 나와 소를 몰고 종일 걸었으므로 점심은 늘 달았다. 기장을 섞은 흰 쌀밥, 형수가 산비탈에서 직접 캔 나물 무침, 그리고 막장에다 지진 풋고추……. 항고 뚜껑으로 샘의 물을 떠 마시고, 항고를 헹구고 나서는 심심풀이로 더덕이나 당귀를 캐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속에 물이 찬 굵은 더덕을 서너 뿌리 씩 캐기도 했다. 보통은 캐자마자 씹어 먹었지만 때로는 더덕 술을 담느라 항고에 넣어 목장으로 가져 오기도
나는 휴전 직후에 태어났지만 전 씨는 전쟁 나던 해에 이미 두 어 살 쯤 되었다. 윤 씨는 전 씨보다 서너 살 많았고, 박 씨는 윤 씨보다 또 서 너 살 많았다. 그러나 전 씨, 박 씨, 윤 씨 세 사람은 객지에서 만난 처지라서 그런지 서로 성에다 씨를 붙이며 말을 높였다. 나는 전 씨를 형이라 불렀고, 다른 분들에게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전 씨는 고향이 목장에서 멀지 않은 삼팔선 부근이지만 박 씨는 휴전선 북쪽인 평강이 고향이고 윤 씨는 고향을 몰랐다. 윤 씨는 고향은 물론 부모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부러 감춘 것이
그로부터 얼마 후 새로 온 목동 김 씨가 면소재지의 처가에 다녀오다가 큰 짐승을 만나 혼비백산한 일이 벌어졌다. 그 때 나는 서울에 볼 일이 있었고, 볼 일을 보고 며칠 놀다가 돌아 왔을 때는 김 씨가 목장 일을 그만 두고 하산해 버렸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형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다. 내 기억의 의심스러운 대목은 형에게 물어 보충하면 되는데, 형은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으니 형수에게 물어야 한다. 40년 전 일이지만 형수도 그 때 같이 살았으니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 씨는 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