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영세 언제 적 제자였나온순하고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조금 절었지지금은 한쪽에서늘 그릇 닦는 마음으로시를 쓰고시 쓰는 마음으로그릇을 닦는다니그러나 시는 썩 좋질 않기, 오히려그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가끌리는가 떵떵거리는잘난 이들 잘 쓴 글보다도―웃기는 짜장면들,영세가 빨리 좋은 여자 만나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면아들 하나 낳아꿈에도 그린다는 아버지가 되었으면이따금 영세를 통해 시를 다시 보고곰곰 내 인생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어참 좋다―영세는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아 장애를 안고 살고 있다 그런데 잘 쓰지는 못하지만
겨울, 생극에 가다 갑작스런 강추위에 귀싸대기가 얼얼하다골짜기 야산 억새 더미눈 부스러기에 뒤덮여 반짝이고새로 생긴 생극 추모공원저마다 숨소리 죽인 납골실마치 대학교 도서관 같다망자들 칸칸이 빼곡하다꽃무더기 속에 묵주알 속에 파묻힌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름과 그 길고 짧은 생몰 연대와한창때 스냅사진들읽는다, 짧을수록 천천히(그러나 다들 책 놓은 지 오래된 우리들인데보아하니 먼지나 털어 주는 겔 게다)어렸을 적 늙었을 적 처녀 적 학생 적살았을 때 가장 좋던 시절 택해누구랄 것 없이 활짝 웃고 있으니! 오히려 가슴 애려어정어정 걸어 나
동안(童顔)내 얼굴 속에는가난이 없구나 어둠이 없구나 굴욕이 없구나 망가짐이 없구나 야비함이 없구나 시들어빠짐이 없구나 철저한 짓밟힘 처절한 헤어짐이 없구나 떠내려감이 없구나 미워함, 표독스러워라, 불붙는 증오가 없구나 굵은 뿌리 꿈틀거리는 절규와 절망 아우성이 없구나 욕정의 흙탕물 넘쳐흐르는 엉망진창이 없구나 아픔도 괴로움도 투쟁도 갈등에 찢어짐도 없구나 시샘의 시궁창 악취도 없구나 하다못해 나태와 방종 싸구려 분내도 없구나 내 얼굴 내 영혼 읽을거리가 없구나 수염 뽑히고 침 뱉고 모욕이 없구나 아무리 봐도 기쁘고 성스러운, 모욕
라파엘라 내가 누구예요몇 살이나 먹었나요여기는 어딘가요 어떻게 나가요문 하나 열 줄 모르는구나곱게 늙으셨는데되게도 똑똑하셨는데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셨는데개망할라니욕을 욕을 밥먹듯이 하시는구나그 많던 세상 지식 지혜 다 잊어 버려숟가락이라 여기셨는감안경으로 밥을 떠먹으시네마침내 홀딱 벗곤 가방을 옷이라자꾸 입으시는구랴외로우면, 다 떠나가고 외로움이 뼈에 저미면때갈스러워지는구나 뻔뻔스러워지는구나남사스러버라! 그 가방나도 함, 입고 싶네요 시작 메모추석날 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기를, 시방 밖에 달이 아주 좋다고 거기도 달이 떴냐고,
은화(隱花) 서녘에 해는 노루 꼬리만큼 남았는데 남자는 옹기짐을 지고 아낙네는 얼라를 업고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이고 구불구불 솔맹이 긴 고갯길 오릅니다 아직 시오리는 더 가고 게서 곁길 접어들어 초군길 자욱 더듬어서도 한참 그제야 비로소 마을에 닿습니다 마을이래야 헛간 몇 채와 오막살이 칠팔 호가 고작 그 곁으로는 옹기 가마가 기다랗게 누워 있는 점말 숯말로 천주교 교우촌입니다, 그곳에서 하루 나물죽 두 끼로 때우며 천주를 위해 조석으로 기도하고 사주 구령에 열심히 힘쓰니 나날이 행복합니다, 둠벙골 느더리 정삼이골 삼박골 새미랑이
추모 미사 지금 경제도 안 좋잖아이제 그만둘 때도 됐잖아라고들 하지 마세요, 그리고 거기자꾸 화장실 뒤에서 담배 피지 마세요아유 증말 또다시 4월이 오고하나 하나 하나 하나엊그제 별이 된 그 녀석들나 이 밤 미사성체를 모신다슬픔과 위로의 마음손톱만큼이라도냈으면얻었으면 제발인간 망종은 되지 말았으면 시작 메모미사가 끝나고 독수리 몇몇, 성당 그 화장실 뒤에 모여 뿌시기 한 대들 피며 얘기합니다. 독수리들은 겉은 멀쩡한데 속으로 심한 우울증이나 깊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애. 나도 그래. 그러며 찍찍들
ㅠㅠ, 2015년 11월 12일 1.어두운 바닷속 가슴 아픈 시간들귀기울여 들어보면 그대들 마음은 언제나괜찮아요 ㅎㅎ 왜 이리도 천사 같냐깊은 바닷속 그리운 이름들눈감고 읽어 보면 그대들 영혼은 언제나미안해요 ㅠㅠ 왜 이다지 꽃다울까 나 그대들 위해 그대들에 대해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 아파하지 않았으며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했는데살려 주세요 밝혀 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못하고날뛰는 파도 빤히 바라보면서 우리 어느 누구 하나 뛰어들어 건져 주지 못했는데잘못만, 온통 잘못만 했을 뿐인데 그저 부끄러울 뿐인데이제 보니
방 구들장 신부님 용산으로 밀양 현장으로 강정마을로 삼보일배로투사로 애국자로 농사꾼으로 살았으니뱃놈으로 사제로 머슴으로 내던졌으니맨날맨날 싸우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아니다, 밑바닥에 깔리기 위해이름마저 구들장으로 바꿨으니안중근도마 의사를 존경해서엄청 존경한 나머지왜적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는 동상까지 세웠으니우리나라 곳곳, 골골을 짯짯이 사랑해서너무 사랑한 나머지 본적마저경기도에서 저 전라도 장성 땅으로 파 갔으니그러나 하느님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하느님께도 이 세상 것본인이 좋아하는 걸루 하나쯤은희생 봉헌해 드려야 했
사순 이마에 한 줌 재를 얹고옷을 찢듯마음을 찢고 시작한다나는씹을 것이다깊은 참회와참회로부터 우러나오는버거운 희생 보속이악습하고 싸움이꿀처럼다디달 때까지나는씹고 또 씹을 것이다썰렁한 나날들칼바람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저 재미없는 사십 일이그래서나는 좋다 시작 메모이제야 재미없는 것들을 추구한다. 재미있는 사람들, 음식들, 자연들, 책들, 사물들 다 떠나자. 단순하고 말없고 시시껄렁하고 시무룩하고 가까이해야 하나도 이득도 안 되는 사람들, 반복되는 지루하고 긴 길들, 걷고 또 걷는 발, 인내심 필요한 되고 된 사물들, 의자들, 깊이는
들꽃 공소 까짓누무거 진정 작아지니이렇게도기쁠 수가오오이 세상에 나 하나아주 보잘것없음이여 꼬락서니하며! 시작 메모이 시는 첫 행과 끝 행에서 운율을 맞춰 봤다. 기교를 부려 봤다. 써 놓고 보니 우연이랄까 ‘까짓누무거’와 ‘꼬락서니하며’가 비스름히 잘 어우러지는 것 같다. 너무 똑같지도 않고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또 앞엣 다섯 소리는 좀 버겁게 뒤 여섯 소리는 좀 가볍게 가고. 그리고 딴에, 그런 기교 트릭을 슥, 묻어 보고자 시어 자체 꼬라지 없는 말들을 갖다 썼다.
무제 어디 가, 성님간만이구나 요한이가 길바닥에 동화책이랍시고 몇 묶음 내다놓고 팔길래뭐랄까? 할매들 시장 모퉁이에 쑥갓이니 시금치 나부랭이니 팔드키 쓰라구만 원을 주자니 성인 같고천 원을 주자니 시인 같아 보이고얼마를 줘야 하나오천 원을 주고 나니 내 맘 다 비운 것 같구나 일전에 개천 공공근로에 나갔다간왜 또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지 않았다냐 비록 남들보다 덜떨어지지만서도전례도 하고 복사도 서고 지역에 방범도 나가고 출석률 하나만큼은 백 퍼센트라! 요한이, 웬만한 인간들 한 트럭보다 훨씬 나아 가끔 여자가 그리운지이 누님 저 누님
오이 고라니 쉼터까지 가면자아,우리 꼭꼭 앉는데 큰 거는나 먹고작은 거는자기 먹고 아, 미카엘라는개뿔도 아닌 내가 뭐라고 시작 메모가재골로 귀촌하고 우리는 평일이면 미동산 임도길을 간다. (농사를 짓거나 소를 키우시는 분들께 너무 면목없다.) 보름달 코스 한 바퀴를 돌면 두 시간 남짓 걸린다. 허름한 옷에 허름한 모자에 허름한 신발에 그냥 호젓하다. 그밖에 것들은 불필요할 뿐이다. 반쯤 가면 고라니 쉼터에 다다른다. 미카엘라는 언제 넣어 왔는지 부시럭거리며 오이 한 개를 꺼내 반을 뚝 분지르곤 비교를 한다. 다음으로 꼭꼭 큰 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