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대하여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길다면 긴 세월을 사는 동물인지라망각은 인간이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하는 것을 관계라 합니다.처음에는 서로 조심합니다.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기도 합니다.아무 문제 없이 관계는 이어집니다. 시간이 지나거나 친숙해지면다시 말하면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있는 듯 없는 듯 편해진 듯 서로를 무시해 갑니다. 참 불행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풍파가 일어나고 갈등이 악화 되어야 자신을 돌아봅니다.지나간 일이어야 후회하는 것이니까요. 이 모든 것이 자연
5부 미카엘라 (1) 우리 처음 허름한 다방에서 맞선을 봤습니다진눈깨비 내리는 겨울이었습니다하나는 웬 중학생만 하고하나는 웬 초등학생만 했습니다둘은 별 재미도 없고 쭈뼛거리기만 할 뿐그러나 서로 싫지는 않았습니다우리는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손도 잡고, 몇 번 더 만나다간 석 달 후결혼을 합니다미카엘라는 참 맑은 아가씨였네요맑고도 소박했습니다허영과 사치를 멀리하며집 없는 것, 차 없는 것심지어 내가 시간 강사 나가는 것 따위외려 큰 힘으로 여겼습니다그래 미카엘라처럼 나 또한하느님의 작은 천사가 되리라 세례를 받았습니다나는 미카엘라를
난 몰라요 하필이면 오월에 장미가 화려하게 피는 것을 유월에 그 고운 빛으로 능소화가 피는 까닭을 여름이 깊어 질수록 봉숭아가 더 붉어지는 이유를 검은 등 뻐꾸기가 네 마디 씩 우는 이유를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하지 지난 초여름에 그 짧은 밤을 뒤척이는 까닭을...
정지 신호 무시하며 과속으로 달려온 세월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이승비둘기호 통일호 정겨운 이름들 역사 속에 묻히고빨리빨리 점점 빨라져야만 살아남는 세상세태보다 더 빠른 기차가 생기고 또 생긴다무궁화호 새마을호도 시들해지고 케이티엑스가 마구 달린다간이역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덩달아 바쁘다바쁜 기차들 모두 떠나보내고 어쩌다 간이역에 정차하는 완행열차바쁜 마음들 서둘러 기차에 오른다가뿐 숨을 몰아쉬며 열차는 떠나고 철길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어충혈된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본다저 하늘은 용서할 수 있을까민주를 어지럽힌 영점칠삼프
미련 모기를 잡으려다 놓치면날아간 모기 생각에 다시 모기가 오려니 하고한참을 그곳만 바라본다. 흥정을 하다가 거의 다 잡은 손님이돌아보고 다시 온다고 떠나면정말로 다시 오기를 바라며수도 없이 밖을 쳐다본다. 어떤 이유에서 건 떠난 연인을 못 잊어 하는 것은날아간 모기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과 지나간 손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삶에 미련이 없는 것도 아쉬운 일이다만미련을 포기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받아들이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메말라 흘릴 눈물 한방울 없어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서러운 마음영원한 안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세태사라지는 것들 마주하는 일상눈물없이 우는 마음 그 누가 아랴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시간서러움만 커가는 세월하루에 한 뼘씩이나 농작물 키우는 땡볕 받으며파묘요 큰 소리로 세번 외치면고요히 잠들었던 영혼들 벌떡 일어나흐느껴 우네서러워 우네
내려놓기 오줌을 누는데오줌이 쉽게 안 나온다.숨을 들이마시고쉬~~~하며 숨을 내쉰다.오줌발은 션찮지만쫄쫄쫄 나온다. 사는 것이 고되고 힘들 때잠시라도 쉼이 필요할 때숨을 크게 들이마시고후~~~하며 숨을 내쉬면가슴 안에 응어리진 덩어리가조금은 작아진 듯한 마음이 든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내려놓는 것은 아닐까?무거운 마음을 지구 중력 방향으로쉬~~~, 후~~~하면마음의 짐이나 몸속 찌꺼기도덩달아 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살면서 버리기 힘들어쌓아놓은 짐들일랑오줌 누는 것처럼한숨 쉬는 것처럼 내려놓으면한결 가볍게 살아질 것이다.
기대 없이 읽었던 책인데 감성이 따뜻하다. 글 사진 최유리 23년 4월 2일 만다링랜드 발행시인 듯 가사인 듯 정감 있는 글들이 속삭인다. 2021년 하루하루를 써 내려갔다. 같은 제목으로 대구로 쓴 글도 많다. 짧은 글에서도 이별을 담담히 그려가는 풍부하고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천안에서 공모전을 통해 작사가로 데뷔한 그녀의 앨범 가사도 수록돼 있다. 글 하나하나가 가사 같고 가사 소재가 될 글감도 많으니 작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어 직접 찍어 글과 잘 어울린다. - 미소 그대
호박꽃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짜증이나 화를 참 많이 내고 살아갑니다. 내 뇌에 저장된 메시지는 그들은 나라고 인지하기 때문입니다.엄마에게, 자식에게,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냈던 일들을 떠 올려 봅니다.믿거니 생각하며 함부로 대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합니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빛나는 아침에 호박꽃이 환하게 핀 것을 보았습니다.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는데 그날은 발길을 멈추고 꽃을 바라보았습니다. 크기며 모양이며 색깔이 참 곱고 예뻤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그들도
4부 염소 선생(3) 별개미 컨테이너온종일 앉아착한 마음 구두를 닦는다허리 구부려늦은 밤 맑은 영혼열쇠를 깎고 도장을 판다진짜 선생이시구나반백의 흐트러진 머리 치켜들면카아, 어둠 뚫고 떠오른인생 한 모금 좋더라푸른 밤바다 얇은 다리 금방노 저어 갈지니삐걱이는 두 짝 잎새 다리여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 하면내 오른손 그 솜씨도 잊혀져라*14,15행은 『구약 성경』 「시편」 136장에 나오는 구절 내 일찍진짜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진종일 틀어박혀구두를 닦고 열쇠를 깎고도장을 팠어야 하는데내 진즉 런닝구가 다 해지도
능선 아버지께서는 그 길을 장등이라 했다.내가 그 길을 걸었을 때는 유년기였다.열 살 남짓했던 나는 소 고삐를 쥐고 시내의 불빛을 내려다 보았다.산자락 아래 멀리 보이는 수 많은 불빛이 아름다웠다. 세월이 지나산악회를 따라 등산을 하면서여인의 부드러운 곡선처럼 펼쳐진 능선을 걸었다.어릴 적 장등은 기억에서 삭제된 채로.. 능선이 부드러운 여인의 맵시가 되는 동안은수없이 많은 세월이 지났으리라.셀 수 없이 많은 빗물과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제 몸을 내어 주었으리라. 나는 장등을 걸었고수많은 산자락을 밟았고산자락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아
종기 배꼽 옆에 피부가 벌개지더니이내 종기가 되더군옷을 입을 때마다 가로부치며아프게 하더니 곪기 시작했어항생제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더 곪으면 짜낼 요량이었지 사나흘 지나니 누런 고름이 보이더라고알콜에 솜에 연고에 밴드를 준비하고아픔을 참아가며 새끼손톱 만하게 커진 종기를 짰어피고름이 꽤 나오더군아팠지, 아프다마다 살아가면서 아픈 일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아픔을 참아내는 수많은 공부를 해봤잖아.고름이 살 되던가?아픔을 견디다 짜내던가 도려내야 하지 않던가?잠깐은 참는 것보다 극심한 아픔이 오더라도 짜내며 살게도려내며 살게 세월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