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 축제의 소동을 피해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고 났을 때 양철배와 일기장이 눈에 뜨였다. 트레킹을 떠나면서 알리멘트에 맡겼다가 찾아온 짐 속에 있었던 장난감들이 언제 책상에 올라갔는지 생각이 안 났다. 어쨌든 혼자 조용히 할 일을 찾았다. 캘커타에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다르질링에 도착하여 어느 날 불현듯 쓰기 시작했던 일기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불과 보름 쯤 전의 기록인데도 아주 오래 된 것 같았다. 다르질링의 운무 속에서 전생처럼 떠오른 기억의 일면들은 그렇다 치고, 쓰다만 유서 같은 편지 한 토막은 남의 글 같아서 여러
이튿날도 하늘이 맑았다. 산책을 다녀오는 길에 광장에서 로티와 밀크 티로 아침을 때웠고, 세탁소에 들러 세탁물을 찾았으며, 내의를 비롯한 의복을 모두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었다. 더러워진 옷들은 다시 세탁소로 가져가 맡기면서 침낭을 찾을 때 같이 찾겠다고 했다. 침낭은 빠르면 다음날, 늦어도 그 다음날 오전에는 도착할 거라고 했다. 만약 오전에 찾는다면 오후에 바로 갱톡으로 떠나고 싶었다. 깨끗한 옷으로 산뜻하게 차려 입고 나온 자는 볼 일 다 봤다고 금방 방구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광장을 거닐다가, 벤치에서 햇볕도 쬐다가, 서점에
마리아 호텔 옥상의 남조선 술꾼 중에서 극소수에게만 밝혔던 그의 전직은 동해상사 김 전무였다. 동해상사는 속초에 있었던 특수부대의 위장 명칭이며, 전무는 현장 요원들을 지휘하는 초급 지휘관의 직위라고 했다. 18세에 가출하여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피를 팔러 갔다가 모병관의 감언이설에 속아 입대했는데 3년 만에 처음 휴가 나오면서 입어본 군복에는 하사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그 이전까지 그는 군인 아닌 군인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2년 전에 전역 신청했는데, 1년 후인 작년에야 통과되었다. 군대생활 20여 년 만에 상사로 전역한
이미 말했던가? 캘커타에서 지냈던 1월은 취생몽사의 나날이었다고? 자세한 얘기는 안 했던 것 같다. 날마다 호텔 마리아의 옥상에서 아침까지 마셨다는 얘기는 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여자의 방 화장실에 따라 들어갔던 얘기는 안 했다. 그런 얘기를 할 때 나는 그가 된다. 비겁하지만 그가 되지 않고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일어서려는 몸짓을 하다가 주저앉곤 했다. 일어서지를 못했던 것이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그들 혹은 그녀들은 낄낄낄 웃기만 했다. 모두 만취했기 때문이다. 대각선
몽사는 43세. 여행이 직업이라고 했다. 주로 오지나 절경을 찾아다니면서 찍고 써서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프리랜서였다. 그는 절경보다 오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들로부터 너 때문에 오지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국내 취재를 포기했다. 대신 취생과 함께 인도, 네팔, 파키스탄, 티베트 등의 히말라야 기슭을 뒤지고 다닌 지 만 2년이 되었다고 했다. 2년 동안 해마다 6개 월 정도는 여행하며 살았으며 이번에도 6개월 일정으로 출국했다고 했다. 몽사가 달변이라면 취생은 말을 아꼈다. 친절하고 명랑한 성품인 듯 했지만 매우 조
애틋한 새소리에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눈 뜨면 바로 일어나 걷던 수개월 동안의 버릇이 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다. 아직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에 이르렀을 때 태권도 도복을 입고 맨발로 달리는 소대 규모의 군인들을 보았다. 트레킹 전에는 못 본 풍경이었다. 사원으로 오르는 계단 주변에 자리 잡고 줄지어 앉아 구걸하는 걸인들도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오직 운무만 보면서 운무 속을 산책했기 때문에 미처 못 봤을 것이다. 사원이 있는 야산을 우회하는 도로를 걷다가 긴 의자와 철봉이 있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쪽, 그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일에 차질을 빚는다. 시킴 입경 허가증이 나오는 데는 1주일 쯤 걸린다고 들었는데 막상 수속을 해 보니 절차가 번거롭긴 해도 몇 시간 만에 허가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오후에 바로 시킴으로 출발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목을 잡은 것은 침낭이었다. 빨래는 날씨만 좋으면 저녁에라도 찾을 수 있지만 침낭은 최소한 사흘은 걸린다고 했다. 드라이클리닝은 그 세탁소에서 하는 게 아니라 전문 업소에 의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르질링을 떠나고 싶어서 허가증을 손에 쥐자마자 세탁소에 가보니 침낭은 이미 전문 업
다르질링은 여행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예상한 그대로 알리멘트에는 빈 방이 없었다. 유스호스텔에는 있겠지 싶었지만 내키지 않았다. 티브이타워 인근에서 숙소를 찾으러 다녔다. 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 방이 하나 비어 있었다. 방 다섯 개가 잇달아 있는 아래층 맨 끝 방이었다. 한쪽 콧방울에 금싸라기 장신구를 붙인 몽골계 여주인이 방문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아 놓고 문 옆으로 비켜섰다. 직접 열고 들어가 보라는 뜻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놓인 나무 침대 위에는 솜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고 침대 밑에는 값싼 카펫을 깔아 놓았다. 통로 쪽으로 낸
셀파 호텔의 주방 메뉴는 훌륭했다. 모모(만두)와 툭바(국물국수)와 차오민(볶은국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장 맛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먹자마자 힘이 날 정도로 훌륭했다. 다르질링의 어떤 식당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별미였다. 도착해서 한숨 자고 난 후에 먹었던 툭바는 낭아(검은 물소)의 살덩어리를 뼈 채로 삶은 육수에 거친 밀가루 국수를 말고 수육 몇 점과 고소를 얹었으며 우리의 산초 비슷한 향신료를 살짝 뿌렸다. 밤에 먹었던 모모는 낭아의 생고기를 고소와 함께 다져서 속을 채웠다. 다음날 아침에 먹은 차오민은 유채 기름
마을 어귀가 보였다. 운무 속에서 나타난 마을은 이승 같기도 하고 저승 같기도 했다. 드문드문 사람들도 나타났다. 쟁기 비슷한 농기구를 수선하는 젊은 남자, 자느라고 목이 꺾인 애를 업고서 뜨개질 하는 여자, 기도 바퀴를 돌리며 어딘가로 열심히 걸어가는 노인. 제각기 무언가에 열중해 있는 그들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불쑥 나타난 털북숭이 개조차 나그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 유계에 발을 딛지 않았나 싶어서 오소소 소름이 돋을 때,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과연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
식은땀을 흘리면서 꿈을 꾸다가 깼다. 무슨 꿈이었을까? 부엉새처럼 생긴 여자의 커다란 두 눈만 잔상처럼 남았다. 펨 도마에게 뇌까린 거짓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날이 밝으면 펨 도마를 대면할 일이 두려웠다. 펨 도마의 아리땁고 순진한 얼굴이 떠오르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눅눅한 침낭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복도로 나와서 산장의 출입문을 살그머니 당겼다. 뎅그렁 뎅그렁, 출입문에 매단 쇠 방울이 몇 번 흔들렸다. 운무 자욱한 마당에는 간밤에 나를 방에 데려다 주었을 늙은 남자가 향연(香煙)이 뭉클뭉
취하면, 취한지도 모르고 취한 기이한 상태가 되면, 처절하거나 비통한 이야기를 꺼내어 과장하고 각색하는 자가 거기 있었다. 창작한 대사를 도취 상태로 읊는 배우가 거기 있었다. 상대의 관심을 끌어내고, 자신에게 몰입하게 하고, 동정과 위로를 얻는 자가 거기 있었다. 그는 붉은 술을 마시면서 펨 도마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섰다고 펨 도마에게 말하고 있었다. 딸은 펨 도마 또래이며 펨 도마와 많이 닮았다고도 했다. 기독교 계통의 봉사단 일원으로 석달 동안 네팔에 체류하면서 임무를 마친 딸은 한 달
온 길을 되짚어서, 그러니까 실리콜라 강을 거슬러서, 끝없이 이어지는 서글픈 상념에 잠겨서, 흙먼지 이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는 중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따라 오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 오던 사람은 상념 속에 스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이제는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년이, 이제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는데, 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보였다. 실리콜라를 따라 일본 청년들과
일본 청년들은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서 뚝뚝 떨어져 걷고 있었다. 나는 맨 뒤에 한참 떨어져서 걸었다. 내 앞에 가는 한 일본 청년은 산모퉁이 길로 접어들 때마다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르질링으로 가는 막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어서 오라고 보내는 신호였다. 염려 말라는 뜻으로 나도 손을 흔들어 주다보니 나는 길 떠나는 식구를 배웅하러 나온 그 동네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멀리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길가의 마을들은 그토록 친숙했다. 마을마다 까말라가 입은 것과 같은 종류의 손뜨개 스웨터를 입은 아이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룸부네 집 부엌에 어린 소녀가 있었다. 먼 산동네에 사는 친척 집에서 데려다 기르는 소녀라고 했다. 장작을 나르고, 물을 길어 오고, 그릇을 씻는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여덟 살 소녀의 이름은 까말라. 까말라는 연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까말라가 입은 스웨터는 우리가 어렸을 때 입었던 것과 흡사했다. 주변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어머니들은 헌 스웨터의 실올을 풀어서 둥글게 감아놨다가 다시 스웨터를 떠서 아이들에게 입혔다. 까말라가 입은 스웨터는 바로 그것과 흡사했다. 얼핏 촌스럽게 보이지만 두
롯지의 주인 룸부 셀파는 고모부를 너무나 많이 닮았다. 천 년 만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인해 보이는 뼈대와 질긴 근육, 불거진 광대뼈와 날카로운 눈, 쇳소리가 나는 음성……. 그러나 웃는 모습은 더 없이 순박해 보이는 것까지 닮았다. 그것은 몽골리언의 공통적인 특질일지도 모른다. 룸부 셀파는 60세라고 했다. 고모부는 그 나이에 이미 노쇠해졌지만 룸부 셀파는 나이답지 않게 건장했다. 그는 아직 해지기 전인데도 유쾌하게 취해서는 부인에게 술 한 병 더 가져오라고 했다. “좋은 술이다. 밑에 내려가
오후 2시. 람만을 향해서 출발. 존이 배웅해 준다며 따라나섰다. 키 큰 금송 숲 샛길을 타박타박 걷자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존은 내년에 대학에 가서 자연 과학을 공부한 후 특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 관찰 학교 교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오전에 산비탈에서 내려다보았던 사만딘 마을을 지나 람만 지역에 들어설 즈음 말 세 마리를 몰고 오는 청년 셋을 만났다. 한 명은 텍 호텔의 둘째 아들이고, 다른 두 명은 팔루트 산장의 산장지기와 그의 동생이었다. 셋 다 검은 고무장화를 신었다. 검은 고무 장화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
다시 날이 밝았다. 변소에 가야 되고, 이를 닦아야 하고, 밥 먹고 길을 떠나야 하는 아침이 온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권태롭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리창 밖에는 햇살과 운무가 뒤섞이고 있었다. 운무 속에서 나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으며, 운무를 뚫고 날아오르는 새가 보이기도 했다. 동쪽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났다. 8시쯤에야 산장을 나서서 외벽에 세워둔 대나무 지팡이 하나를 챙겨 들었다. 하산 길은 파란 시누대 숲 사이로 나 있었다. 걷기 좋았다. 시누대 숲에서
8시쯤 팔루트를 향해 떠났다. 뒤따라 온 일본 청년들이 앞질러 갔다. 산등성이 길은 완만했다. 심한 비탈은 거의 없었다. 응달진 곳에서는 잔설(殘雪)을 밟고 걸었으며 때로는 랄리구라스 숲 사이를 걸었다. 우리나라 철쭉이나 진달래와 흡사한 랄리구라스의 붉은 꽃망울에는 하얀 눈꽃이 붙어 있기도 했다.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파래서 머리에 물을 이고 걷는 듯했다. 산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듯한 칸첸중가를 향해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았다. 산닥푸
아침 6시. 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불었다. 체왕 롯지 앞의 룽따는 곧 찢어질듯이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고원은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언덕 위에서 히말라야가 펼쳐져 있을법한 북쪽을 바라봤지만 히말라야 쪽에는 두꺼운 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구름 위로 해가 솟고 금빛 햇살이 마을 골목을 비출 때 쯤 멀리서 뎅그렁 뎅그렁 쇠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소들이 허연 입김을 뿜으며 올라왔다. 이 소들은 고산의 소 야크와 저지대의 물소의 교배종인 ‘조’인데 등에 땔감을 잔뜩 짊어졌다. 체왕 호텔 부엌에서는 벌써 아침 준비하는 연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