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4가와 청계천 4가 사이의 시계 골목에 냉면집이 있었다. 외가 친척들은 곰보냉면집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머니를 따라서 맨처음 그 집에 갔던 때는 전학 수속을 하던 중인 1963년 5월이었다. 친척들이 앉아있는 방바닥에 장판이 아니라 쌀가마니를 튿어서 깔아놨었다. 모인 친척들이 어른들만 열 명이 넘었다. 피난 나온 가족 모임이 이 정도면 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친척들이 남아있을지가 궁금했을 법한데, 그런 걸 물었던 기억은 없다. 계동 할머니처럼 전쟁 전에 삼팔선을 넘어 월남한 친척들도 있지만 일사 후퇴 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화물
풀 니들은 꼴찌다아니다갸들 머리 나쁘잖다외려좋다그러므로 니들 맨날맨날꼴찌에서 둘째꼴찌에서 셋째꼴찌에서 넷째다아갸, 꼴찌도 못하공진실하기만 하면 다냐 마음순수하기만 하면 다냐 시작 메모꼴찌 하는 애들은 풀이 아닙니다. 즤가 하고저 하면 꼴찌를 안 할 수 있는데도 즤가 자꾸 꼴찌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해도, 하고 또 해도 꼴찌에서 둘째, 꼴지에서 셋째, 꼴찌에서 넷째 하는 애들이 정말 풀입니다. 갸들이야말로 이슬이, 하늘이, 아름이랍니다. 갸들이야말로 둥근잎꿩에비름이랍니다.
어느 날 학교 철봉대 밑 모래판에서 그 녀석들과 맞서 싸웠다. 물론 일방적으로 얻어 터져 코피까지 났지만 이를 악물고 결사적으로 덤빈 탓에 버스표도 전차표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날도 나는 걸어서 돌아왔다. 빼앗기지 않은 버스표로 학교 앞에서 번데기를 사먹고, 전차표로는 멍게를 사먹었다.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나를 보러 오는 어머니는 아들을 혜화동 로터리의 빵집에 데려가서 빵을 사줬다. 어떤 때는 그 옆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줬다. 용돈은 주지 않았다. 내가 학교 앞 노점에서 불량 식품이나 사먹고 만화나 빌려 볼 것이
'존엄'([尊嚴)........국어사전에 검색하니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함부로 범할 수 없이 높고 엄숙하다고 나와있다. 뭔가 와닿지 않고 막연하다. 그럼 임금이나 고위 관료 등의 출세하신 분에게만 붙일 수 있는 단어이고 일개 서민, 백수, 하층민은 존엄하지 않다는 뜻인가? 북한의 어떤 치에게 가져다 붙이는 최고존엄이네 뭐네 하는 인간 추종과 우상화가 연상이 되어 콧방귀만 낀다. 괜히 상대적 열등감의 발로로 삐딱선을 타는 게 아니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인간은 전부 존엄하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가? 영어로는 dignity
아직도 어른이 되는 중이죠- 마혜경 주머니에 시간을 넣는다구멍으로 모래가 떨어지고 쌓여서 시간이 된다떨어진 시간은 모래가 된다모래는 뒤집으면 시간이 되지마시간은 뒤집을 수 없고주머니에 꽂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아이는 무사히 어른이 된다어른이 된 아이는 어른이 아닐 때가 많다침을 뱉고 어른 흉내를 내지만아주 가끔 어른일 뿐이다사람들이 모래처럼 떨어질 때누군가는 시침으로 나침반을 만들고아이는 꿈을 꾼다떨어질 때마다 키가 크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모래도 시간도 구멍으로 떨어지지만구멍은 떨어지지 않고주머니의
성북동 큰아버지네 마루방은 큰아버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이젤만 세워져 있고, 어떤 때는 작업중인 캔바스가 이젤에 올려져 있었다. 큰아버지가 마루방에 테라핀 냄새를 풍기며 유화를 그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마루방에 세워져있던 큼직한 인물화가 생각난다. 큰아버지가 그린 계동 할머니다. 도록을 찾아보니 나온다. 그림 속의 계동할머니는 남색 마고자 차림이다. 상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갠 자세로 단정하게 앉아 있다. 팔꿈치 밑에는 작업 중인 색동천이 깔려 있고 배경에는 재봉틀이 놓여 있다. 계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 백석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길을 떠나고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프로스트의 작은 말은 누구네 숲 앞에 발을 멎고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릴케는 핏속에 시를 실어 나른다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나는 너와 말없는 글과 밤눈을 걷고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크리스마스에 시가 내리면 크리스마스에 니가 내리면 If Poem Falls on Christmas If poem falls on ChristmasBaeksok leaves the road with Natasha and white don
정릉 큰아버지 집 식구들은 커다랗고 둥그런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 일요일 점심 상에 올린 상추는 큰어머니와 내가 뒷마당에서 같이 뜯었다. 큰어머니, 그러니까 외숙모는 절구로 으깬 멸치를 고추장 된장에 섞어서 쌈장을 만들었다. 쌈장은 가지찜에도 들어갔다. 봄에는 찬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짠무를 얹어 먹기도 했다. 겨울 내내 독에서 숙성된 짠무는 맛이 좋았다. 도시락 반찬이 되기도 했다. 수제비를 만들던 기억도 난다. 마당에 연탄이 든 화덕을 놓고 큰 들통을 올렸다. 들통에서 끓는 물속에 들어 있는 야구공만한 양철통에는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 즉 나의 외숙을 우리는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쳤기에 우리 자식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큰아버지 내외는 슬하에 1남 4녀를 차례로 두고 L 자 형태의 아담한 개량 한옥에 살았다.대문 안에 들어서면 작은 마당 왼쪽이 문간방이며 문간방에서 부엌이 이어졌고, 부엌은 안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안방 옆의 마루방은 마당과 대문을 향했는데 마루방 옆에는 건넌방이 있었다. 건넌방은 누이 넷이 같이 썼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옛날 개량 한옥이 다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엌 문
참고 또 참다가 촛불 들었던 사람들이 촛불로 탄생한 정권을 나무라고촛불로 물러난 권력 사라졌어야할 적폐들 시퍼렇게 살아함께 정권을 나무라는 오늘국가의 안위와 민족의 평화 번영 통일에는 관심없이조직에만 충성하는 망나니들의 칼춤에 조국이 휘둘릴 때구름 사이를 비집고 쏟아지는 햇살혼돈과 혼선이 흩어지고뜻모를 모국어들이 하늘로 날아오르네아우성치네안전하지 않은 시간들이 일상을 덮고인간 스스로 만든 아귀다툼의 상처는 깊다우월적 지위 이용하는 갑질 횡포 분쇄할 수 없을까편법으로 소비자를 속이고 돈만 챙기는 파렴치 몰아낼 수 없을까
아직도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내는 23살, 나는 25살에 처음 만나 6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 했다.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싶었다. 결혼 3년차에 모아둔 돈을 가지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아내의 오랜 바램이었다. 물론 누구보다 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내겐 이루지 못할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비록 정해진 일정을 다 채우진 못했지만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이야기한다."다시 돌아간다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무엇하나 결정된 미래의 여정이 없었기에 두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밀려오라 최근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다. 왼쪽 눈의 안압이 위험 수치로 높아 졌으니 이젠 술을 멀리 하라는 전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못 지킬 약속은 하지 않는다. 노력은 해 보겠다 하고 나왔다. 올려다본 하늘은 뒤지게 맑다.시큰하게 흐릿한 눈 속 초점이 안 맞는 술병을 보며 둘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나는 본디 술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비효율적인 것을 혐오했다. 굳이 돈을 들여가며 몸을 망치고 중독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 주량을 감당하지 못해 어불성설이 되는 꼴을 보면 우스웠다. 숙취에
거리두기와 상실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내가 상상하는 100년 후 미래의 포스터를 그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시 학급에선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미래는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도래할 거라는 그림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본인은 절대적인 디스토피아 옹호자였기 때문에 대기 오염과 전염병 등으로 모두가 마스크와 방독면을 착용하고 다니는 미래인의 모습과 뿌연 하늘의 미래를 그려내곤 했다.그런데 100년, 50년 이후도 아닌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벌써 디스토피아가 도래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거리에 나올 때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난 핑계를 찾고 있다- 마혜경 밤에게 물었다 어디서 어둠이 물든 거냐고 무엇을 쏟았길래 얼룩이 생겼냐고 별을 표백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태양이 빛나면 발밑에 숨어버리는 그림자도 골목을 걷는 사람들 등에도 어둠이 묻어 있었다 유독 별을 통과한 밤만 깨끗했다 농담을 좋아하나요 밤이 내게 물었다 조금, 사실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그날 누군가를 스쳤는데 그때 으스러졌다며 그의 어깨가 물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조각 몇 개가 떨어져 구멍이 났는데 빛이 그 사이로 빠졌다며 사람들이 그것을 별이라 부른다 했다나에게 물었다 아니 밤이 나에게
나목수많은 사연이 있었으리라여럿의 수근거림도 들었으리라긴 세월을 한 자리에만서있는 것도 힘든 일 이었으리라그 세월동안 지나간 겨울을 이겨냈으니 그저 대견할 밖에봄부터 싹이 돋아 반짝이는 환희나무초리마다 담은 사연들 모아우듬지까지 전하며 여름을 이어 갔겠지아귀차게 여물어 가을엔 풍요를 선물하고말이 없다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말없는 가운데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데불쌍한 중생들은 금강경이 좋다고만 하지경 속엔 관심을 두지 않는다나무가 겨울을 이겨내는 침묵은엄혹한 세상을 견디는 인내와 같지 않을까?
다리를 센다날카롭게 뻗어나가는 하얀 다리들비상등이 명멸하는 복도 끝의 인쇄실에서복도는 밤이면 흩날리는 종이 인형처럼 푸른빛의 절지동물로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장염이 돈다고 한다소독약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면장이 꼬여 꿈틀거리는 다리, 지네, 다리허벅지에 잔뜩 묻어 있는 하얀 가루를 털어내면나는 종종 집에 가는 길이 적힌 지도를 잃어버린다 복도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하얀 실핏줄이 툭툭 터져버린 다리들이 걸어온다바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를 돌아보면우리는 거기가 밖인 줄 알고 틈을 찾아 고개를 처박는 습성이 있다 여름 장마가
2019년 12월22일, 한 국회의원이 공항에서 공항직원과 실랑이를 벌인 일로 비난을 받고 있다. 신분증을 보여주라는 요구에 지갑에서 꺼내 제시하지 않고 지갑 속 투명 비닐 안에 있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꺼내라는 요구에 반응하지 않아 생긴 사소한 일인데 이런 사소한 일들이 불거지고 문제가 그냥 넘어가지 않는 현 세태가 더 우려스럽다. 그걸 특권의식에서 발생한 국회의원의 갑질이라고 비난한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안 보여준 것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 공항을 감사하는 국토위 소속이고 하다 보니 자신의 이름을 대면 그냥 넘어갈 줄 정도의 대
우리말 바로 쓰기 윤한로언젠가 양주탈춤 읽는데왜, 묵중들 수작에 ‘월려?’ 하는 대목이 나오네이건 또 뭐여, 시방 뭐라케소, 어쭈,쯤으로 알아먹을란다아무튼 고릿적 시골구석에서나 쓰던참으로 귀한 말이라 내 얼마나 반갑더냐이런 말 요즘 국어원국어사전이나다음, 네이버 사전 들엔 눈 씻고찾아봐도 절대 나오지 않지나빌레라, 아름따다, 하릴없이, 시나브로,따위 아름다운 우리말 많이 찾아 쓴다지만이게 ‘월려’ 같진 않네쟁그랍고 정겹고 그립고 큼큼하고우리 동네에도 무슨 월려 씨라고 있는데아마 그 옛날 태어날 때 얼굴이나 울음소리영낙없이 고추라 허
다음 주가 크리스마스다. 코로나19로 블루 크리스마스지만 연인에게 랜선으로 사랑 시를 선물해보자. 그렇게 오래된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감각 있는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은 1806년 3월 6일에 태어나 1861년 6월 29일에 사망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 대시인이다. 바렛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상속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결혼 전엔 이름과 성이 같았던 엘리자베스 바렛 바렛, EBB로 서명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소네트 14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소네트 43 「내가 당신을 사랑
기별도 없이 매서운 손님이 찾아왔다. 우리를 너무도 당황케 만든다. 손님이 주인이 된 격이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동선을 바꾸고 각별히 살피며 주시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무례한 걸까. 수소문 끝에 알게 된 정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이다. 미미한 존재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손과 발을 단번에 옭아맨다. 모든 것이 느려졌다. 아니 질주하던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고 물자의 이동과 돈의 흐름이 멈추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외국과 왕래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는 하나이기에 모든 흐름이 막히면 일상이 고립된다.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