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에 대하여- 마혜경 검은 물결 사이로 희고 작은 방울들쏴아아 쏴아아, 포말을 그리다콧등에서 톡 토독,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를 만나든 주저하지 말아라오차 없이 정확하게 목적만을 도려내는비록 속은 안 보여도 뾰족한 맛 짜릿한 바다 멀리 갔나 싶더니 다시 돌아와목청껏 노래하는 달달한 밤하늘톡 토독, 영혼을 갉아내는 소리 칼날 같은제국 같은
이상한 동물원에서- 마혜경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북극곰과 한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최악의 디자인이야 재주 좀 부려보시지두 발로 오래 서있네미련 곰탱이그러나 세 번 중에 한 번은 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에나, 쯧쯧쯧 이렇게 서로를 관람하는데티켓은 왜 한쪽에서만 끊어야 할까
내 짝궁- 마혜경 밥 안 먹는 누렁이 발맘발맘 따라가니분홍머리 흰둥이와 폴짝폴짝 꼬리잡기누렁아, 밥 먹어야지 집에 가자 빨리 와 다가가면 도망치고 약 올라 쫓아가니흰둥이 찾아 나온 전학 온 그 아이하얀 손 피아노 소리 콩닥콩닥 발그레
어떤 사과- 마혜경 순녀 씨네 가족은 강원도 큰 언니네 과수원으로 휴가를 갔다 올라오는 날 수고비라며 사과 다섯 박스가 트렁크에 실렸다 뒤에 앉은 딸과 순녀 씨는 도로의 사정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차가 멈췄다 조금 달렸다 딸의 노래가 잠들었다잠시 후 오른쪽 길입니다남여주 IC로 빠져나오니 이제 길이 뚫렸다 콰과 쾅,추월하려던 대형 크레인이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반 바퀴를 돌고 멈췄다 순녀 씨와 딸은 아직 모른다사과가 대신 터졌다는 걸여태 사과향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떤 사과는자신의 쓸모를 다르게 해석한다
시지프스의 무게- 마혜경 신호에 멈춘다한 남자가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수레에 물건이 잔뜩 있다박스는 언제나 궁금하다 쿠쿠 압력밥솥 10인용삼성 김치냉장고대우 식기세척기LG 공기청정기오뚜기 식용유농심 신라면박카스 참이슬 새우깡청송 사과당근주스카스,저게 다 얼마야당장 하나 준다면 식기세척기를 골라야지그러나 누군가 손댄 빈 박스 그의 마누라와 아들 딸에게도새 박스를 뜯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착한 무게를 잴 수 있도록.
질투를 부르는 데이트- 마혜경 토요일 오후였죠 3시를 조금 넘은송도 거리는 신발들로 간지러웠고적당히 소름 끼쳤죠발길 따라 낙엽들의 이정표가 바뀌고어떤 구름은 못 본 척합니다 볼수록 예쁜 건 너 하나뿐.그들의 대화는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나뭇잎을 하나를떼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순간이 너무 달달해서나무는 화가 났어요홀로 엿듣다 질투가 났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마혜경 아바 사르나와 노니는 결혼했다분명 재산을 노린 거야,열여덟 살 노니가일흔한 살 아바를 꼬셨다며사람들은 그녀를 의심했다 사랑은 이렇게도 시작된다기름 가게에서 일하는 노니가아바네 농경지로 농기구 기름을 배달하면서둘은 정이 들었다53년의 간격에 기름 한 방울이라도 닿은 걸까 가난한 아바에게서 금 11g과 840만 루피아를 받은 노니 가족은간소한 결혼 준비로 딸의 사랑을 존중했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소식에이곳에서도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늙은이가 돈으로 매수했어,모두 아바를 의심했다 암만 떠
때로는 -마혜경 손수레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하고 있다아, 죽고 싶어? 미친 인간아노인을 간신히 피한 차들이 창문을 열고 같은 욕설을 한다지나가던 한 노인이 달려와노인의 손을 잡고 주변에 수신호를 보낸다 클락션 소리 두 배로 울린다 묻지마라법의 잣대로 따지지 마라누구나 길 잃을 자격이 있지 않나
문틈 사이로- 마혜경 문에 매달려 놀았던 적이 있다열렸다 닫혔다 반원을 그으며발끝으로 벽을 밀고 왼쪽 오른쪽삐걱 쇳소리에 노래를 부르다대문 내려앉는다, 야단을 맞고서야매달린 문에서 내려왔었다 골목에서 문을 보았다한 뼘 정도 열린 틈으로매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매달아본다작게 둥근 선을 그으며 왼쪽 오른쪽최대한 소리소문없이 매달려본다노래도 어떤 소리도 들키지 않아야단치는 사람이 올 수 없다 어떤 틈은 추억을 부른다
배꼽-마혜경 주소가 생겼다숫자를 지우니 좀 더 본질적인오아시스에 딱 맞는 검지손가락 누군가 오랫동안 누른 초인종처럼
저 빛을 보라- 마혜경 젊어서는 처자식을 업고 다녔다그는 별을 읽으며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그때마다 돌쟁이 아들의 잠꼬대를베고 잠들었다세상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떠들어도그의 등에 실린 짐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들은 지 살기에 바쁘고아내는 류머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그의 어깨는 언제쯤 가벼워질까세상의 무게 모두 내려와 언제쯤 동그랗게 빛날까
너의 여덟 살, 이제 안녕- 마혜경 9월 14일 오전 11시 16분,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임대주택 2층에서 불이 났다형과 동생은 심한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그날 엄마가 있었다면비대면 수업이 아니었다면라면을 끓이지 않았다면아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열 살 형은 호전 됐지만 여덟 살 동생은 38일만에 눈을 감았다 신이 다녀간 8년을 뒤늦게 알았다